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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영의 ‘나, 싱글맘’] 너도 될 수 있어, 1급 기능사

  • 기사입력 2022.01.22 13:54
  • 최종수정 2022.01.22 13:55

아무도 모르는 나의 취미 하나를 자백하고자 한다. 왜 자백이고 하니, 취미를 즐기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염탐꾼이어서다. 하지만 염탐꾼이라니 가당찮다. 나는 그저 그것의 다섯 글자를 확인하고 돌아설 뿐이다. 그것은 몇 년 전 세 개의 질문과 함께 찾아왔다.

1. 첫 번째 질문

그날 아침 아이를 등원시키고 오다가 어린이집 친구 엄마와 마주친 나는 대화 끝에 케케묵은 질문을 받았다. (내가 이혼한 싱글맘임을 안 순간 태도를 바꿔 이런 떠보기 하소연을 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이혼할 것도 아니면서).

“세상에, 소림 어머님은 별다른 대책 없이(=능력이든 돈이든 쥐뿔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혼을 감행한 거죠? 그 용기가 부러워요! 나도 남편이랑 헤어지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나거든요.”

이런 질문 아닌 질문을 받으면 속으로 ‘그대는 눈치까지 없구료. 자칫 무례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답니다.’라고 타이른 후 입으론 아무 말이나 뇌까린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튀어나온 말을 소개한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죠. 지금도 답을 찾고 있으나 이것만은 알아요. 그와 계속 살았다면 내가 나를 밥버러지로 여겼을 거예요.”

이 말을 할 때의 나는 사뭇 엄숙하면서도 고요한 미소를 짓는데 그래야 만족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매우 연연해한다(하지만 초연한 척 살아가고 있다). 또한 상대가 밉상 캐릭터면 이 말을 덧붙인다.

“저런, 이혼하고 싶은데 못하고 계시는군요. 앗, 망각이 특기인 제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책 구절 중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어요! <글쓰기 공작소>에서 이만교 작가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종종 나를 소설가라고 소개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다고 부러워하는 회사원이나 주부들을 자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지? 당신이 무의식 중에 정말로 원하는 것은, 회사원이나 주부로서 안정된 삶을 살면서 소설가나 화가를 보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삶이 아닐까’ 현재의 나는 자기 선택의 결과예요. 어떤 가치에 중점을 뒀든 누구나 티끌만큼이라도 이로운 곳에 서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상대방은 대개 눈치 없는 이들이 그렇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듣고 보니 그렇네요.’ 수긍하고 행복한 여자로 돌아간다. 어쩌겠는가. 나도 허허 웃고 돌아선다. 몇 걸음 전진해 완전한 혼자가 되면 내 머리 위에는 작은 먹구름이 나타나고, 개인용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걸어갈 진데. 나는 왜 번지르르한 명함 하나 없이 살아와서는 사람들에게 저런 의문을 안겨주는 것인가. 허울 좋은 꿈, 작가. 그 말을 내놓을 수도 없다. 나는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확인시켜주는 용도로만 소비될 것인가. 아, 이것은 비인가 눈물인가.

2. 두 번째 질문

그 길로 집에 오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어린이집? 엄마들은 본인 핸드폰에 어린이집이나 학교 전화번호가 뜨면 우선 덜컹한다. 그러니 나도 덜컹. 여보세요?

소림 어머님, 원장이에요.

소림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게 아니라 지금 바로 **재단에 가보시라고 연락드렸어요.

네? 왜......거기가 어딘데요?

직원 출산휴가로 공석이 났대요. 소림 어머님 면접 보러 한번 가보셔요.

한부모를 돕겠다고 원장선생님은 본인의 정보력을 동원해 내가 바란 적 없는 친절을 베푼 것이다. 당황했고, 내키지 않았지만 갔다.

경찰서 안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니 대표로 보이는 50대 남성과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대표는 입으로만 미소를 장착하고 재단 소개를 시작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부자들이 불우한 청소년을 지원하는 재단이었다. 대표는 면담 끝에 다음날부터의 출근을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를 뽑지 않았다. 대표의 마지막 질문 때문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야근을 해야 하는데 남편이 아이를 볼 수 있냐 묻기에 나는 싱글맘이라서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웃음과 남은 질문을 거둔 그는 함께 일하기 어렵겠다며 내 앞의 커피잔을 거두어 갔다.

내심 기뻤고 경찰서를 나서면서 울적해졌다. 버스 두 대를 보내고 천천히 걸어갔다. 기쁨의 이유는 대표의 어떤 말이 내 말초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재단 설명을 신나게 하던 그가 말을 멈추더니 ‘사모님들에게 잘 보이면 콩고물을 얻을 수 있’다고 내게 속삭였다. 울적의 원인은 까여서가 아니다. ‘싱글맘’ 소리를 듣자마자 달라진 상대의 태도에 나는 피유피유 쪼그라든 풍선이 됐다. 불우해졌다.

3. 세 번째 질문

집 앞까지 와서는 발길을 돌려 뒷산으로 향했다.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가슴이 터지리라. 내 동네라 뒷산이라 부를 뿐 ‘봉산’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산. 뾰족구두를 신고 정상에 올랐다. 나란히 서 있는 봉수대를 보면서 과거의 고독한 군인을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불붙이면 남산타워의 누군가가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나. 다시 자문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거지?” 나는 ‘그러게 왜 싱글맘이라는 사실을 밝혔냐’며 혀를 차는 원장선생님 문자를 다시 읽으면서 욕을 해댔다. 그리고 난간에 매달려 먼 한강을 잠시 보다가 하산했다.

산을 벗어나면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날따라 낯선 길을 택했다. 한참을 걷다가 물집 잡힌 발을 구두에서 반만 빼 삐딱하게 서 있으려니 눈앞에 허름한 이발소가 보였다. 유리창에는 주인의 솜씨인 듯 일정하지 않은 크기의 흰색 글자 스티커가 아치형으로 붙어 있었다.

‘헤어. 컷트. 염색. 면도’. 보통의 소개였다. 그런데 아치형 밑으로 글자가 더 있었다.

“1급 기능사”

울컥했다. 천문대에서 토성을 관측했던 순간 같기도, 선생님 통솔 하에 친구들 손을 잡고 산책하는 소림을 마주쳐 후다닥 전봇대 뒤에 숨어 훔쳐볼 때의 마음 같기도, 여하튼 정체가 불분명하나 ‘1급 기능사’가 심연의 무엇을 깨운 것만은 확실했다.

기능사는 수준 높은 숙련기능을 가진 이에게 부여하는 국가기술자격으로 1973년에 탄생했다. 그것은 국가기술자격 5개 등급(기술사, 기능장, 기사, 산업기사, 기능사) 중 최하위이면서 유일하게 자격 제한이 없는 등급이다. 지금은 기능사는 있되 ‘1급’ 기능사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순전한 내 상상이다) 이발소 주인은 나이가 꽤 지긋한 분일 것이다. 그 옛날, 합격증을 들고 뛰쳐 들어온 이발소 주인은 가장 높은 등급의 기능사를 취득했다며 어머니와 아내를 안고 덩실덩실 춤췄을지 모른다. 이후 가장들의 깎여나간 머리카락과 수염이 그의 처자식을 먹여 살렸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1급 기능사를 어찌 안 써 붙일 수 있겠는가. 행인들이시여, 내가 바로 1급 기능사이올시다! 그때부터 아치형의 ‘헤어. 컷트. 염색. 면도’가 학익진으로 보였다. 시련과 고난으로부터 1급 기능사를 보호하는 학익진.

사람답게 사는 삶은 나를 자랑할 때 완성되는 것이었다. 타인의 인정을 업은, 자랑 아닌 자부심 말이다. 1급 기능사를 따는 데 자격 제한이란 없다. 나도 그것이 될 수 있고 반 정도는 이루었다. 내가 선택한 인생, 딸과 둘이 유머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체가 나의 자부심이니까! 나는 이제 동화작가가 꿈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당당함이 사그라들 때도 있다. 그런 날에는 봉산을 오른다, 1급 기능사를 만나려고.

오늘도 작가계의 1급 기능사를 꿈꾸는 백조 한 마리가 목표를 향해 헤엄쳐가고 있다. 우아한 척 물밑은 부산스럽다. 목표도 나를 향해 오고 있다. 황지우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는가.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망부석의 기다림이 아니다. 엉덩이의 힘으로 우직하게 나아가는 기다림이다. 그러나 나아감이 꼭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참, 1급 기능사의 조건이 아예 없진 않더라. 그것은 그러함에도 ‘포기하지 않기’다.

우리 동네 허름한 이발소 창에 붙은 ‘1급 기능사’ 표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우리 동네 허름한 이발소 창에 붙은 ‘1급 기능사’ 표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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