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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비동의 강간죄’ 도입 촉구한 유엔에 반대 의사 밝혀

“입증 책임을 가해자에게 전가, 여성의 의지 폄하”
여성 및 인권단체는 즉각 규탄 성명 발표

  • 기사입력 2023.06.14 15:15

우먼타임스 = 한기봉 기자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던 ‘비동의강간죄(또는 비동의간음죄)’가 윤석열 정권의 핵심인사들과 법무부에 의해 하루아침에 좌절돼 논란이 일었었다. 지난 1월의 일이다.

당시 여가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기자회견에서 비동의강간죄 입법 추진을 발표했다. 그러나 곧바로 법무부가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9시간 만에 철회했다.

그날 친윤 실세인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 법이 도입되면 합의해 성관계를 하고도 상대방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동의 여부를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나. 무엇보다 비동의간음죄는 성관계 시 ‘예’, ‘아니오’라는 의사표시도 제대로 못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성인남녀를 평가절하한다. 이와 같은 일부 정치인의 왜곡된 훈육 의식이야말로 남녀갈등을 과열시킨 주범이다”라며 여가부를 압박했다.

현재 형법상 강간죄는 현저히 저항이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는 경우에만 적용된다, 이에 따라 폭행 또는 협박이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를 강간죄로 처벌하긴 어렵다.

비동의강간죄는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 해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관계는 강간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강간죄가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기에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서도 입법을 추진했고 지난번(21대) 국회에서도 10건이나 관련 개정안이 발의됐다. 법무부도 그때에는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와 신중론도 만만치 않고 충분한 논의 없이 회기가 만료되면서 입법까지 이뤄지지는 못했다.

그러다 이번 정부에서 폐지 기로에 서있는 여가부가 관련 부처와 충분한 협의 없이 재차 꺼내들었다가 스스로 접어버린 촌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후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세계적 추세에 맞춰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하라는 촉구가 계속 있어왔지만 국회와 정부 주도의 논의와 검토는 사실상 중단돼 있는 상태다.

여성 및 인권 단체 연대인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2019년 9월 국회 앞에서 비동의강간좌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 및 인권 단체 연대인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2019년 9월 국회 앞에서 비동의강간좌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동의강간죄에 반대하는 정부 입장이 다시 확인됐다. 정부가 유엔 산하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관련 질의에 대해 입법에 반대한다는 답변을 보낸 것이다.

12일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6월 6일 이 기구에 보낸 서면답변서에서 “소위 ‘비동의간음죄’ 도입은 성폭력 범죄의 근본 체계에 관한 문제로서, (도입할 경우 검사에게 있는) 입증 책임을 사실상 피고인에게 전가시키고, 여성의 의지나 능력을 폄하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각 국가들이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감독하는 기구다. 이 위원회는 지난 3월 우리 정부에 “형법 제297조를 개정하여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 위원회는 지난 5년간 우리 정부에 대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할 것을 5차례나 권고한 바 있다.

정부의 이런 답변이 알려지자마자 240개 여성‧시민사회단체가 규탄성명을 내놨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등 240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13일 ‘정부는 성평등 퇴행 백래시를 멈추고, 성폭력 법적 체계 개선에 나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냈다.

이 단체들은 “형법 제297조에서는 폭행·협박을 강간 범죄 성립의 필수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입증 책임은 여전히 피해자의 몫”이라면서 “물리적 폭행 협박이 동반되지 않은 사건의 경우 수사사법기관은 피해자에게 그에 준할 만큼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가 있었는지 끊임없이 묻고 입증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부는 성폭력, 성희롱, 가정폭력, 성착취가 여성의 의지나 능력이 없어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는가? 성폭력이 사회 구조적 성차별에 기반한 폭력임을 간과한다면, 정부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물었다.

또 “정부의 서면답변은 성평등 개선에 역행하는 백래시이며 윤석열 정부는 성폭력특별법에 ‘무고죄’ 신설을 공약한 성평등 백래시 정부”라고 비판하고 세계적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비동의간음죄 도입의 필요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1~3월 전국 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66개 상담소의 강간피해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직접적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 사례’는 71.4%(735명)나 됐다.

피해자가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취약한 지위나 금전적 의존 상태, 술이나 약물이나 잠에 취한 심신 상태, 공포나 위협감을 느끼는 상황, 소문이나 보복이 두려운 경우 등에서 이뤄지는 성관계 등이다.

비동의강간죄 도입 반대론자들은 업무나 고용, 지위 등에서 위계·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이미 다른 법으로 처벌이 가능하고, 동의 여부에 대한 증거 수집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피고인의 자기 방어권 보장이 침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든다.

또 단순한 동의 여부가 성폭력범죄의 결정적 기준이 된다면 남녀 사이의 성적 소통과 행위에 대한 자율성을 침해하게 되고 국가가 지나치게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에 간섭하며 과잉형벌이 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신중론자들은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한 해외에서도 부작용이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 성폭력 범죄 처벌 법체계 전반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충분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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