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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어공주’ ‘클레오파트라’ ‘헤르미온느’가 흑인이라고?

원작 훼손,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여
차별과 편견 배제도 좋지만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 비판도

  • 기사입력 2023.04.21 17:04
  • 최종수정 2023.04.22 11:13

우먼타임스 = 한기봉 기자

‘인어공주’와 ‘클레오파트라’와 ‘해리 포터’의 여주인공 ‘헤르미온느’가 영화 속에서 백인이 아닌 흑인 여성이라면 어색할까?

관객은 이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고정관념이기도 하다. 창작의 세계에서 이들이 꼭 피부가 하얀 여성이어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영화와 공연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 어린이들한테 사랑받는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의 실사영화(5월 국내 개봉) 주인공 아리엘 역을 흑인 가수이자 배우인 핼리 베일리(19)가 맡았다.

역시 다음 달에 공개되는 넷플릭스 역사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Queen Cleopatra)’에서도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클레오파트라 역을 연기했다.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리메이크되고 있는 ‘해리포터’에서도 여주인공 헤르미온느 역에 유색인종 배우가 캐스팅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흐름은 차별과 편견을 배제하자는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 캠페인의 일환이기도 한데, 과연 그게 언제나 온당한가라는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동화나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역사 속 실재 인물인 클레오파트라의 경우에는 역사 왜곡 논란도 빚어지고 있다. 

◇흑인 인어공주

5월 개봉 예정인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주연으로 연기했다.
5월 개봉 예정인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주연으로 연기했다.

월트 디즈니는 199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큰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을 실사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미 ‘정글북’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등 여러 작품을 실사화해서 흥행에 성공했다.

5월 말 미국과 한국에서 개봉 예정인 실사판 ‘인어공주’는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논란에 휩싸인 영화다. 흑인 가수이자 배우인 23세 할리 베일리(Halle Bailey, 2001년 영화 '몬스터 볼'로 유색인종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리 베리 Halle Berry와 다른 인물)를 주인공 아리엘 역에 캐스팅한 것이다. 베일리는 자신의 트위터에 ‘꿈은 이루어진다’며 만화영화 속 아리엘의 사진을 올렸다.

영화 출연이 처음인 베일리는 언니인 클로이와 함께 R&B 듀오인 ‘클로이 앤 할리’(CHLOE X HALLE)로 인기를 얻은 가수다. 지난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뉴 아티스트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인종 문제에 민감한 미국 사회에서 인어공주를 유색인종으로 바꾼 것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티저 영상에는 '싫어요'가 수백 만이 넘게 달렸다. "원작을 훼손하면서까지 왜 굳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 반대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불과하다는 반박도 많았다. 

디즈니는 작년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2:인터넷 속으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화이트워싱’은 백인이 아닌 역할에도 무조건 백인을 캐스팅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 팬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의 흑인 공주인 티아나가 ‘주먹왕 랄프2’에서는 지나치게 백인처럼 표현됐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 때문에 개봉을 한 달 앞두고 등장인물을 다시 그리는 소동이 빚어졌다.

디즈니는 1997년 실사영화인 ‘신데렐라’에서 주인공 역을 흑인 가수 브랜디에 맡긴 적도 있다.

◇흑인 클레오파트라

5월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Queen Cleopatra)’.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5월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Queen Cleopatra)’.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30년)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퀸 클레오파트라’는 5월 10일 공개된다.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자 이번에는 역사 왜곡 논쟁이 벌어졌다. 신화나 동화가 아닌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인종을 바꾸는 건 문제라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혈통으로 백인이며, 여러 유물들이 입증한다는 것이 이집트와 그리스 등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이집트와 그리스 역사학계는 ‘흑인 클레오파트라’에 반발하고 있다.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을 지냈던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이집트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는 완전히 가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였고 금발이었다. 넷플릭스는 이집트 문명의 기원이 흑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이집트인은 국제 청원 사이트 ‘체인지’에 “역사를 왜곡하는 넷플릭스의 ‘퀸 클레오파트라’ 개봉을 취소하라”는 글을 올려 8만50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속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으로 대를 이었기 때문에 흑인 유전자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각에선 한때 아프리카 흑인들이 이집트를 지배해 파라오를 차지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정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공교롭게도 ‘퀸 클레오파트라’ 제작사인 웨스트브룩 스튜디오는 흑인 배우 부부인 윌 스미스와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설립했다. 작가들도 모두 흑인이다.

제작사는 이에 대해 “우리는 그간 흑인 여왕에 대한 이야길 듣지 못했지만, 세상엔 많은 흑인 여왕이 존재했다”고 말했다. 13일 공개된 이 드라마의 공식 예고편에 등장한 해설자는 “우리 할머니는 학교에서 뭐라고 가르치든 간에 늘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라는 증거가 있어서 흑인 배우를 썼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그동안의 클레오파트라 영화에서는 모두 백인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1945년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비비안 리가, 1963년 ‘클레오파트라’에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2002년 ‘미션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을 맡았다

◇흑인 헤르미온느

10살이던 2000년에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헤르미온느를 연기한 엠마 왓슨.
10살이던 2000년에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헤르미온느를 연기한 엠마 왓슨.

영국 매체들은 워너브라더스와 HBO 맥스의 합작으로 제작 중인 ‘해리 포터’ 드라마 판에서 여주인공 헤르미온느가 유색인종으로 캐스팅될 거라고 보도했다. 백인인 영국 출신 엠마 왓슨이 10살 때 이 역으로 데뷔해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헤르미온느의 피부색을 바꾼 것에 대해 현지에서는 “정치적 올바름만을 인식해 작품의 원래 캐릭터를 훼손하지 말라”는 비판이 나왔다.

유색인종 배우가 연극에서는 헤르미온느 역에 캐스팅된 적이 있다. 2016년 2부작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에서 흑인 배우 노마 두메즈웨니가 맡았다.

당시 원작자 J.K. 롤링은 영국 언론 가디언 인터뷰에서 “노마는 이 역할에 가장 적합한 배우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며 캐스팅을 옹호했다. 그는 “일부 해리 포터 팬들이 원작 소설에 헤르미온느의 외모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어 인종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책에서 헤르미온느의 피부색을 언급한 적은 없다”라고 밝혔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논쟁

언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적 지향·직업 등의 편견과 차별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세계적인 캠페인이다.

특히 다민족국가인 미국에서 정치적 관점에서 차별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1980년대 미국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돼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어맨(chairman)’을 ‘체어 퍼슨(chairperson)’으로, 흑인은 중립적인 ‘African-American(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부르자는 것도 이런 운동의 일환이다.

과거에 출간된 명작 소설들에서도 인종차별적 표현을 수정해 재출간하는 움직임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그 개념과 취지에 과도하게 집착해 대중의 거부감과 반감을 유발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상업적으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받는다.

흑인 배우인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된 ‘인어공주’는 백인으로 설정된 덴마크 동화 원작을 훼손하면서까지 과도하게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 클레오파트라’도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블랙 워싱(black washing)’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토론을 침묵시킨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또 이를 추구하는 소비자가 늘어나자 대중문화 업계가 상품성 높은 작품에 한해 취하는 상업적전략에 불과하다는 말도 많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국내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확한’이라는 뜻의 ‘correct’라는 단어에 윤리적, 도덕적으로 ‘올바른’이라는 의미는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관에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진보 계열 학자가 만든 번역 용어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정치적 정확성’이나 ‘정치적 적절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내에서는 유명 원작 주인공의 성별을 바꾼 공연도 있었다. 2020년 7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은 극단의 대표작 ‘햄릿’을 왕자가 아닌 공주로 바꾸고 여성인 이봉련 배우를 캐스팅했다. 햄릿의 상대역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바꿨다.

당시 부새롬 연출은 “햄릿이 여성이어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왕권을 갈망하고 복수하고 싶고 남성과 같은 이유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별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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