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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수학교사 노옥희... 그는 왜 노동운동가-교육감이 되었나

울산 첫 진보교육감...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
실습 중 손목 잘린 제자의 산재 사고 후 노동 현실에 눈 돌려

  • 기사입력 2022.12.09 16:23
  • 최종수정 2022.12.09 19:33

우먼타임스 = 곽은영 기자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8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노 교육감은 생전 울산 지역 첫 진보 여성 교육감으로 최하위권이었던 울산교육청 청렴도와 교육복지를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았다. 진보교육 거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교육계와 정치계, 노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울산시교육청에 따르면 노 교육감은 8일 낮 12시 25분쯤 울산시 남구 한 식당에서 열린 지역 기관장 오찬 모임 도중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며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되며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결국 낮 12시 53분 사망 판정을 받았다.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일 오전까지 정상 출근해 함께 일한 노 교육감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울산교육청 직원들은 황망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8일 별세했다. 울산 지역 첫 여성 교육감이자 진보 교육감으로 교육 개혁과 교육복지 확대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연합뉴스)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8일 별세했다. 울산 지역 첫 여성 교육감이자 진보 교육감으로 교육 개혁과 교육복지 확대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연합뉴스)

◇ 교사 시절 만난 제자가 바꿔놓은 삶

노 교육감은 울산 지역 첫 여성 교육감이자 진보 교육감으로 당선돼 재선까지 성공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195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김해 금곡초등학교, 한림중학교, 부산 데레사여자고등학교, 부산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부터 울산 현대공고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범한 교사였던 노 교육감이 노동자의 삶과 사회운동에 관심이 갖기 시작한 건 초임 교사 시절 현대공고에서 실습을 나갔던 제자가 손목이 잘리는 산재 사고를 당하면서부터였다. 학교에 다닐 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쉬는 시간에 학교 매점에서 일하면서 공부했던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겪은 절망감을 마주한 노 교육감은 당시 도움을 주고자 동분서주 뛰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산재를 당해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목격하며 그는 교사 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한국YMCA 독서모임 등을 하면서 교육 현실에 눈을 떴고 1986년 교육 민주화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직됐다. 노동문제상담소에서 간사로 일하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는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2대 울산지부장을 지낸 노 교육감은 해직되고 13년 만인 1999년 울산 명덕여중 교사로 복직했으나 2002년 울산시 교육위원 출마를 위해 퇴직했다. 이후 2006년까지 교육위원을 지냈다. 

교육개혁과 노동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정치에도 뛰어들었지만 처음에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06년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각각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울산시장 후보로, 2008년 총선에서는 진보신당 동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018년 제7회 지방선거에서는 울산교육감 후보로 출마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7명의 후보가 각축을 벌인 선거였다. 그는 성적으로 줄 세우는 낡은 교육과 비리로 얼룩진 교육계를 울산 교육의 현주소로 진단하고 부정부패 척결, 교육복지 확대, 교육과정 혁신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울산 첫 진보·여성 교육감이 탄생했다. 20년간 울산 교육계에 이어져 오던 보수정당의 판을 뒤엎는 진보정당 출신의 등장이었다. 

◇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 철학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후보 시절이던 6월 1일 오후 울산시 남구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당선이 확실시되자 남편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후보 시절이던 6월 1일 오후 울산시 남구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당선이 확실시되자 남편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 

노 교육감의 교육철학이었다. 아이들이 배움에서 소외되지 않고 미래를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그는 교육복지 확대에 힘을 쏟았다. 고교 전면 무상급식 시행, 신입생 교복비 지원, 초등학교 입학준비금 지원이 그 일환이다. 코로나19가 확대되던 2020년 4월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울산지역 모든 유치원과 초·중·고 및 특수학교 학생 1인당 10만 원의 ‘교육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노 교육감은 첫 임기 동안 전국 최하위권이었던 울산교육청의 청렴도와 교육복지를 전국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 부패와 비리를 강력하게 근절하는 대책으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울산 교육계의 청렴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그는 시도 교육감 직무수행 여론평가에서도 매번 최상위권에 올랐다. 

그는 올해 초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공교육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도우며 등교하는 첫 날 어린이들 손을 잡고 동행해 격려하기도 했다. 당시 주민들의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 입학반대 시위가 거셌지만 공정한 교육기회를 보장하고 원만한 학교생활 적응을 돕고자 한국문화적응반 운영 등 맞춤형 교육을 지원했다. 

지난 선거에서는 유치원 무상 교육 실현, 배움성장집중학년제 운영, 학생 체험 공간 확대를 공약했다. 노 교육감은 올해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그가 울산 지역 학부모와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 6·1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이후 노 교육감은 “맞춤형 교육복지와 미래 책임교육 등을 실현해 울산교육이 우리나라 공교육의 표준이 되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노 교육감은 남편과 1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남편 전창수씨와는 1989년 노조 탄압 규탄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 결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인권 지킨 교육감에 애도의 물결

9일 오전 고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의 분향소가 마련된 울산시교육청 외솔회의실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오전 고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의 분향소가 마련된 울산시교육청 외솔회의실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 교육감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정계와 교육계·노동계의 애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8일 애도문을 내고 “우리나라 교육 발전을 위한 고(故) 노 교육감님의 열정과 뜻을 잊지 않겠다. 고인은 울산 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감으로서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 교육’ 실현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추모했다.

울산시교원단체총연합회는 애도문에서 “울산 1만 7000여 명의 교육자와 함께 고 노옥희 교육감이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것에 대해 깊이 애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는 성명에서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울산 교육’ 이 한 문장에 노 교육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고인은 가장 적극적인 교육 복지 교육감이었고 지금도 준비 중인 고인의 교육복지 정책은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노 교육감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울산시는 김두겸 시장은 애도문에서 “울산교육을 우리나라 공교육의 표준으로 삼겠다던 고인의 위대한 열정과 뜻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울산시당은 애도문을 내고 “울산에서는 최초로 진보, 여성 교육감으로 당선돼 울산교육청의 청렴도와 교육복지를 상위권에 끌어올리신 분”이라고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울산시당도 애도문을 통해 “부패하고 부끄러운 울산교육을 청산하고 대한민국 혁신 교육을 선도하는 울산교육을 만들겠다는 노 교육감의 신념은 울산의 교육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추모했다.

페이스북 등 SNS에도 추모 글이 이어졌다.

김형민씨는 페이스북에서 “한 번도 보수 세력이 놓친 적이 없는 울산 교육감에 당선된 것은 평생 오른쪽 후보만 찍어온 사람들도 인정했던 그녀의 성실함과 노력 덕이었다고 들었다. 갑자기 이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온 담벼락이 조용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며 애도하는 걸 보며 그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절감한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누리꾼들은 “아프간 난민들 왔을 때 일부 주민의 거부로 아이들이 등교를 못하게 생겼을 때 직접 손 잡고 등교하는 모습으로 큰 인상을 줬었다”, “사람이 현실을 바꾸고자 용감하게 뛰어들고 그 길을 끝까지 간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안타깝고 이른 이별이다”, “인권과 다원적 가치를 지키는 교육을 몸소 실천하셨다”며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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