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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영의 ‘나, 싱글맘’] 엄마가 되는 바람에 사랑을 알아버렸다

  • 기사입력 2022.07.15 23:28

코로나에 걸렸다. 동거인 딸 소림이도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확진자가 부득이하게 보건소나 병원을 방문할 시 대중교통 아닌 자차로 이동해야 한다. 나에겐 자가용도, 소림을 병원에 데려가 줄 대체 보호자도 없다. “아, 그러십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어? 없어!” 포털사이트가 호들갑을 떨면서 방역 밴을 이용하라고 알려줬다. “와, 그런 게 있다니! 그런데 요금이, 7만 원? 장난하십니까?” 분하지만 걷는 수밖에. 보건소까지는 27분, 선별진료소가 있는 병원까지는 20분이 걸린다. 병원은 언덕 위에 있다.

집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너 번 넘어질 뻔했다. ‘뻔하다’는 버텼음을 의미하나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보도블록 턱에 걸려서가 아니라 현기증이 나서 넘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현기증이 감지되면 사람은 겁먹는다. 하지만 아이가 보고 있어서 나는 꼭대기에서 멈춘 대관람차 속 엄마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우린 곧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다고 담백하게 말하기. 괜히 한번 웃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지 않는 주먹이 내 왼쪽 머리를 때렸다.

병원은 63빌딩이었다. 어디서든 크게 보이지만 금세 닿지 않았다. 소림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우리가 꼭 잿빛이 된 세상을 헤매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던 <더 로드>의 부자(父子) 같았다. 뒤에선 우릴 잡아먹겠다고 인간 사냥꾼들이 쫓아오는데 나는 달릴 수가 없다. 그때 나의 왼편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실례할게요 하더니 우리 앞을 분주히 가로질러 갔다. 안전모를 쓴 아저씨였다. 왼쪽을 보니 세상에, 전에 없던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랜드캐니언을 본뜬 조악한 관광지 같았다.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나 보다. 이런 절벽과 맞닥칠 때면 잠수교에 매달려 찰랑이는 깊고 검은 물을 바라봤던 스무 살의 그 밤으로 돌아간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실제로 나는 구멍에 빠져 죽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살면서 두 번 죽을 뻔했다(물론 과거의 한 시점에서 내 바로 뒤 행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맞고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모르면 없는 일이니까). 이 두 번은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경험을 말한다. 첫 번째 위기는 여덟 살 겨울에 찾아왔다(미리 얘기하는데 두 번째 배경도 그해 겨울이다. 1986년 겨울에 대체 무슨 기운이!).

오빠랑 나는 겨울이면 매일같이 화전 스케이트장에 갔다. 추수를 끝내고 많은 이의 배를 채워 준 화전의 그 논은 겨울이면 어린이들의 놀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빙상은 내 얼굴 같았다. 요철이 심했다. 씽씽 얼음을 지치다가 부지불식간 튀어나온 얼음에 걸려 날아가면서도 나는 꺄하하거렸다. 오빠랑 나는 스케이트장 한쪽에 놓인 넉가래를 차지하겠다고 자주 다퉜다. 넉가래는 눈이나 얼음을 쓸어 한쪽에 모아놓을 때 쓰는 도구다. 철 재질이라 내가 끌기엔 역부족이었던 그것은 늘 오빠 차지였다.

하루는 외삼촌이랑 스케이트장에 갔다. 한참 노는데 삼촌이랑 오빠가 컵라면을 먹겠다면서 휴게소로 쓰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갔다. 캐릭터상 컵라면을 선택했어야 할 나는 그날은 넉가래 갖고 놀 생각에 얼음판을 고수했다. 나는 내 키만 한 넉가래 손잡이를 잡고선 눈을 밀겠다고 앞쪽으로 세게 힘을 줬다. 넉가래는 꿈쩍 않고 다른 것이 움직였다. 그렇다, 나다. 빠르게 슉, 반동으로 뒤로 미끄러져 간 내가 풍덩, 물웅덩이에 빠졌다. 모두가 안전불감증을 앓던 시절이었다. 논 모서리마다 얼음이 깨져 있어도 누구 하나 막는 이 없었다. 알아서 주의해야 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나는 허우적댔다. ‘내가 어른이라면, 아니 세 살 차이 나는 오빠의 키 정도만 되었어도 장수탕의 냉탕에서처럼 평화로이 서 있을 텐데’, 얼음 바람 속 냉수마찰을 받으며 나이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부당한 처사에 분통이 터졌다(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해 죽는 어린이가 얼마나 많을까!). 설상가상 물먹은 핑크 오리털 점퍼가 나를 자꾸만 물 밑으로 끌고 갔다. 아빠가 외할머니댁 근처 유진상가에서 사 준 백조 날개 같은 피겨 스케이트도 오리털 점퍼랑 같은 편이었다. 난 너희가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꼬로로 물속으로 가라앉는 찰나, 소영아! 삼촌이 내 손을 잡았다.

눈을 뜨니 옷가지를 들고 우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호기심 소녀였던 내가 연필로 귀를 파서 이비인후과 수술을 받던 날에도, 박쥐인간처럼 뛰어내리겠다면서 장롱 꼭대기에서 날아 전등갓에 이마를 그어 열 바늘 꿰맨 날에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소영이가 많이 아플 텐데, 하면서. 나는 비닐하우스 안 연탄난로 앞에 누운 채로 엄마를 빤히 보다가 컵라면을 요구했고, 엄마는 이 와중에도 컵라면을 먹겠다는 걸 보니 내 딸 정신이 돌아온 게 확실하다면서 환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두 번째로 죽을 뻔했던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수영장도 아닌 데서 익사할 뻔했던 나는 이번에는 먹거리가 풍족한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굳이 기체를, 연탄가스를 마셨다. 마침 우리집 안방에서는 태봉연립(내가 태어난 연립) 계원들과 부모님이 48장짜리 꽃무늬 딱지로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그 중 비 광의 사내를 닮은 이층아저씨가 참다 참다 화장실로 달려갔고, 문 앞에 쓰러져있는 나의 오빠를 발견했다. 오빠는 세이프를 위해 다이아몬드를 돌고 온 사람처럼 한쪽 팔을 화장실 문턱에 터치한 채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자기 목숨줄과 세이프? 아님 요의랑? 그에 반해 나는 강을 떠내려가는 밀레이의 그림 속 오필리아처럼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있었다고 한다(나에게만 아름다운 비유를 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아빠는 자식 둘을 한꺼번에 안고 뛰쳐나갔다. 꽃밭에 남매를 나란히 눕히더니 흙냄새를 맡아 얘들아, 소리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나는 아빠가 으으 우는 건 봤어도 엉엉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빠가 미운 날엔 아빠가 나를 꽃밭에 눕히면서 목놓아 우는 모습을 떠올린다. 흙냄새를 맡고 일어난 내가 흙 묻은 손으로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빠, 나 이제 괜찮아” 배시시 웃는다. 그러면 아빠는 기뻐서 울겠지. 흙냄새를 맡고도 일어나지 못한 남매는 세브란스로 이송됐다. 나는 또 살았다.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세 번째 죽음에 직면했다. 최악의 상태이기도 했지만 외로움에 죽을 지경이다.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줄 것인가! 하지만 나를 위해 내가 울어서라도 병원으로 가야 한다. 아이의 안위를 확인하는 게 급선무다. 옆을 보니 직사광선이 내 아이의 정수리를 통과하고 있다. 아파트 공사 현장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서 나는 소림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미안해.

부연 없는 이 말에 땀에 전 소림이 말했다.

에이, 괜찮아. 엄마가 코로나 걸리고 싶어서 걸렸나? 제일 힘든 사람은 엄마지. 그리고 우리에겐 차가 없으니까, 버스 타고 가면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으니까 걸어가는 게 맞지. 엄마, 아직도 많이 아프지? 걷는 것도 힘들지? 뽀뽀도 못 하고 에이 참.

그 순간 번쩍,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그것은 별똥별처럼 내 이마에 밝고 굵은 선을 긋고 사라졌다. 소림을 낳은 날부터 지금까지의 순간이 시퀀스로 흘러간다. 밤마다 우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면서 같이 울었던 내가 마침내 새근새근 잠든 소림의 이마를 쓸며 미소 짓던 밤, 어린이집에서 산책 나온 소림을 마주쳐 황급히 전봇대 뒤에 숨어 훌쩍이던 나(단체에 섞여 있는 아이를 보면 왜 눈물이 나는지!), 벌에 쏘인 소림을 안고 뛰던 순간, 인형뽑기 기계에서 곰돌이 인형을 빼내 흔들면서 엄마 최고 까르르 웃던 소림.

나는 엄마가 되는 바람에 사랑을 알아버렸다. 세상의 어리고 여린 것들, 그러니까 모두에게는 엄마가(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엄마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이렇게, 아이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더는 누가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아도 된다. 자부심으로 극복하니까. 우리가 가는 곳이 남쪽이다!

언덕의 병원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선별진료소가 을씨년스럽다. 채취 직전 아이가 뒷걸음치길래 뒤에서 안아줬다. 우리는 온 대로 걸어 돌아갔고, 다음날 문자를 받았다. ‘음성’이었다.

소림이가 네 살 때 화엄사에서. 바쁜 걸음 어디를 향하고 있니? 어디가 되었든 소림이 네가 가는 곳이 우리의 남쪽이야.
소림이가 네 살 때 화엄사에서. 바쁜 걸음 어디를 향하고 있니? 어디가 되었든 소림이 네가 가는 곳이 우리의 남쪽이야.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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