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성주의’ 시인 김혜순, 세계 문단에 우뚝 서다

한국 시인 최초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수상
한국계 미국인 시인 최돈미 번역

  • 기사입력 2024.03.25 14:05
  • 최종수정 2024.03.25 15:16

우먼타임스 = 한기봉 기자

수상작 ‘날개 환상통’의 국내판과 최돈미 시인이 번역한 영어판 ‘Phantom Pain Wings’. (문학과지성사 제공)
수상작 ‘날개 환상통’의 국내판과 최돈미 시인이 번역한 영어판 ‘Phantom Pain Wings’. (문학과지성사 제공)

시인 김혜순(69)은 한국 시문학의 최고 정점에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평론가는 없다. 문학평론으로 먼저 등단한 뒤 시인이 된 그는 수많은 문학상을 휩쓸었고 해외에도 인지도가 있다.

그는 여성의 글쓰기에 대해 누구보다 천착해온 작가이며 같은 해 데뷔한 세 살 많은 최승자와 함께 ‘여성주의’ ‘페미니즘’ 시의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

김혜순 시인이 세계 문학계에 우뚝 섰다. 시집 ‘날개 환상통’의 영어번역판 ‘Phantom Pain Wings’이 지난 21일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BC 어워즈) 시 부문을 수상한 것이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등단 40주년이던 201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열세번째 시집이다.

올해 최종후보작 5개 중 번역본은 이 시집이 유일했다. 한국계 미국인 시인 최돈미가 번역했는데 번역시집이 수상한 첫 사례다. 이 시집은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말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포함되기도 했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는 미국의 언론·출판계에 종사하는 도서평론가들이 1974년 뉴욕에서 창설한 비영리 단체로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매년 미국에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책을 선정해 시·소설·논픽션·전기·번역서 부문별로 상을 준다.

주최측은 이 시집에 대해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대담하게, 전쟁과 독재의 여파,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삶의 고통, 이를 극복하는 의식을 대안적 상상의 세계로 반영한다”고 평가했다.

이번 시상식에 두 시인은 참석하지 않았다. 제프리 양 시집 편집자는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는 김 시인의 수상 소감을 대독했다.

김 시인은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전혀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다. 아시아 여자에게 상을 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 훌륭한 번역으로 오래 함께해 온 최돈미씨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최돈미씨는 김 시인의 전작 시집 ‘불쌍한 사랑 기계’,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죽음의 자서전’ 등 7권을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출간했다.

2019년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2019 그리핀 시문학상’ 시상식에서 최종 수상소감을 말하는 김혜순(왼쪽) 시인과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번역한 최돈미 시인 겸 번역가(문학과지성사 제공)
2019년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2019 그리핀 시문학상’ 시상식에서 최종 수상소감을 말하는 김혜순(왼쪽) 시인과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번역한 최돈미 시인 겸 번역가(문학과지성사 제공)

곽효환 한국문화번역원장은 “김 시인은 국제상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시 부문에서 벌써 다섯 차례 수상하며 문화적 장벽을 넘고 있다”며 “최돈미 번역가처럼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밝은 번역가들의 등장으로 번역의 질이 높아지면서 국제상에 자주 호명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언론에 말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각인시킨 쾌거”라며 “수상을 계기로 전 세계 독자들이 김혜순 작가의 환상적인 시 세계에 매료되고, 한국 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축전을 보냈다.

김 시인은 ‘미래파’와 페미니즘 시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가족주의 억압에 갇힌 여성성을 탐구하는 방법을 시로 제시해 왔으며, ‘여성시’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다. 김행숙 시인 등 미래파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를 쓴다’ 하지 않고, 몸이 ‘시 한다’(doing)고 표현한다. 제도로서 굳어진 것, 당연시되는 것, 남성적 시작법의 거부다. 여성의 몸과 언어를 탐구하며 다른 말하기 방식을 고민해왔다. 시론집 ‘여성, 시하다’(2017)에서 “‘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했다.

최근의 김혜순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최근의 김혜순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김 시인은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당선되면서 비평가로 등단했고, 시인으로는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시를 쓰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시집으로는 ‘또 다른 별에서’(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 ‘우리들의 음화’(1990), ‘불쌍한 사랑 기계’(1997), ‘한잔의 붉은 거울’(2004), ‘피어라 돼지’(2016), ‘죽음의 자서전’(2016),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 등이 있다. 산문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등이 있다. 시론에 대해서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상, 삼성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2019년 아시아 여성 최초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을,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을 받았다.

1955년 강원 울진(현 경북) 출생으로 원주여고를 졸업하고 강원대 국문과를 다니다 건국대 국문과로 옮겨 졸업했다. 1989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돼 2021년까지 강단에 섰다. 극작가 이강백과 결혼했다.

수상작/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려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만 안 본 뉴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