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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우리에겐 확신이 필요해

이민경 저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기사입력 2023.11.28 14:44
  • 최종수정 2023.11.28 15:08

종종 ‘과거에 존재했더라면’이라고 상상해본 적 있다. 근대기의 나, 조선시대의 나, 삼국시대의 나, 국가라는 형태가 없던 과거의 나. 끝없이 타고 들어가는 상상 속에서 두려움을 꽤 느꼈다. 전쟁과 약탈이 빈번했던 시기에 여성의 입지는 말할 것도 없이 참혹했다. 

현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종종 들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런 일 안 당해서 다행”이었다. 현대의 여성이라 지금 이 정도를 지켜내며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무력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런 안도와 역사의식, 과연 건강한 게 맞을까?

(봄알람)
(봄알람)

그러다 이민경 작가의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으며 평소 감지해오던 나의 옹졸한 안도감을 확인하고 말았다. 가족들의 이름 사이 공백 속에서 자란 여성은 시집가면 출가외인, 남성을 주인으로 두고 살아왔던 호주제의 시절처럼 여성은 예로부터 계보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지금은 출가외인이나 남성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 그 과정에는 분명한 계보가 있을 터였다.

“과거에 태어났다고 가정할 때 느껴지는 공포, 제법 나아졌다는 안도, 그리고 미래에는 더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낙관. 나는 ‘페미니즘이 변화를 가장 빠르게 이루어낸 운동이기에 낙관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24p”

“호주제를 지적하면 사랑하는 사람끼리 누가 호주인 게 무슨 대수냐는 말을 듣지 않을까. 그렇다면 각자가 각자의 주인인 채 서로 사랑할 수는 없는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결혼을 하더라도, 남편이 죽으면 호주가 되어줄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딸은 아버지의 호적에 머물다가 남편의 호적으로 옮겨 갈 존재이므로 어디도 흔적을 남길 수 없다. 아이를 낳고 이혼하면 자녀는 동거인으로만 기록된다. 재혼을 해도 아이는 친부의 호적에 남는다. 새아버지의 성으로 바꾸려면 아이를 사망신고한 후 출생신고 해야 해서 누군가는 빈 관을 붙잡고 울었다고 했다. - 34p”

분명 나는 호주제가 멀쩡하게 세상에 존재할 때 태어나 살고 있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낳아 구박받던 엄마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시련의 세월을 관통하는 동안 세상엔 수많은 페미니스트의 계보가 기록되고 있었다. 

세상은 엉망진창인 채 변함없이 부피만 늘려온 게 아니었다. 진창의 사이를 비집고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와 운동이 벌어졌고 승리를 거뒀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가진 건 한국보다 23년이나 늦었다. 프랑스에서 기혼 여성이 남편의 허가 없이 직업을 갖거나 자신 이름으로 계좌를 열 수 있게 된 건 5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성희롱이라는 개념은 1974년에서야 미국에서 처음 사용했다. 

먼 옛날도 아닌 고작 1994년 우리나라 광주에서는 크롭티를 입은 두 여성이 경범죄처벌법 단속으로 즉심 회부됐다. 르완다에서는 2003년에야 여성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건 고작 2015년의 일이다. 일본에서는 이혼한 여성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성에게 6개월간 재혼 금지 기간을 뒀고, 2016년에는 금지 기간이 100일로 줄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2023년 시점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차별이지만 승리를 거두기 이전에는 불가한 영역이었다. 지금으로선 이해되지 않는 차별이 잘못됐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투쟁한 과거 여성들에게 나는 승리의 빚을 지고 사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가끔 외로웠던 나날들이 위로를 받는 기분마저 든다.

차별을 차별이라고 선을 그을 때, 부조리함을 참지 않을 때, 망설임 끝에 타인의 오류를 짚을 때 나는 참 외로웠다. 이렇게 말 한마디 보탠다고, 입바른 소리 한다고, 글을 쓴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무력함이 있었다. 그럴 때 필요했던 건 역시 확신이었다. 자그마한 노력이 모여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믿음과 확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힘을 실어 흘려보내야 한다는 믿음. 과거 여성들의 계보가 지워지지 않도록 나의 말과 글이 계속돼야 함을 나는 이 책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저 시간문제이리라는 막연한 낙관에는 나아가는 데 시간과 힘을 들인 누군가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 거저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나아진다. 어쩌면 나아지지 않을지 몰라도, 절망할 때마다 여전히 나는 이 믿음에 기댄다. - 127p”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역사교과서에서 지워진 여성의 계보를 찾아가는 워크북이다. 

저자 이민경은 작가, 번역가, 사업가. 페미니스트로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 <잃어버린 임금을 차아서>, <유럽 낙태 여행>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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