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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가부장 찢어버리기

이유리 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기사입력 2023.07.25 11:47

언제부턴가 ‘뮤즈’라는 단어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이지만, 동음이의어로써 뮤즈는 작가,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그런데 뮤즈는 작가와 화가에게 영감을 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걸까? 

영감은 무형의 어떤 영향력, 자극 등을 말하는데 사람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달랑 사진 한 장만 소지해도 뮤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화가에게 뮤즈란 연인이자 성적 파트너이자 조수였고 쓰임이 끝나면 헤어지거나 생명을 다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뮤즈는 항상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당대의 여성 화가와 작가에게 뮤즈란 누구였을까. 뮤즈가 있긴 있었을까. 우리가 이미 접해본 여성 화가들, 또 오늘 소개할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에서 소개한 여성 화가들은 남성 뮤즈를 지닌 사례가 없다. 남성을 모델로 삼아 작업을 한 사례는 있지만, 성을 착취하고 잡무와 집안일을 시키진 않았다. 그러니 과거 남성 화가에게 뮤즈란 가부장으로서 취할 수 있는 단물을 최대한 취하고, 외부에는 여신과 같은 존재로 대상화한 소유물에 불과했다. 뮤즈 타령에 신물이 날 수밖에 없다.

( 한겨례출판사)
( 한겨례출판사)

그래서인지 이유리 작가의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읽으며 나는 통쾌하면서 화가 났다.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화가들의 활약에 가려진 뮤즈, 아내로서의 그림자는 여성의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희생되고, 소유물로 격하되는 여성의 역사 말이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음식처럼 먹음직스럽게 전시되다가, 결혼해 ‘가부장제의 일개미’가 되라고 권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여성들이 ‘빨간 알약’을 먹었다. 점점 더 거세지는 페미니즘 학습의 열풍이 언젠가는 가부장제라는 ‘매트릭스’를 깨부술 수 있기를 희망하며. - 125p”

대부분 19세기까지 벌어진 일이지만 현대 미술이라고 온전히 평등한 영역은 아니다. 기생 출신 화가가 잘되는 꼴을 도무지 봐줄 수 없어 그림이 찢기고, 자기만의 작품세계로써 그려낸 꽃 그림을 고작 여성 성기에 빗대어 해석하는 폭력은 바로 우리가 지나쳐온 20세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는 2023년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마녀사냥을 당하고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기대하는 시선에 검열을 받고 있다. 피해자가 맛집에 가고 셀카를 찍으면 거짓말한 꽃뱀이 아니냐는 의심부터 시작한다. 혹여나 미움받기 무서워 사용하는 쿠션어는 또 어떠한가. 조심스럽고, 소극적이고, 남이 듣기 좋은 말만 해야 비난받지 않는다며 쿠션어를 사용한다면 여성의 입지는 뮤즈를 소비하던 19세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모독의 역사에 자극을 받아 젠틸레스키처럼 살아볼 이유가 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피해자로 남겨두는 대신 가해자를 세상에 고발하는 젠틸레스키의 자세는 가부장제에 물들어있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자는 삶이 망가진 사람이 아니다. 폭력의 경험을 ‘삶을 압도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에게서 ‘피해자다움’이 아니라 ‘생존자다움’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려 ‘가해자다움’을 보자. 가해자답게 ‘셀프 용서’하지 말기를, 가해자답게 숨죽이고 살기를, 가해자답게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건 생각도 하지 않기를, 가해자는 가해자답게 살도록 압박하자. 치욕은 성폭력 피해자의 짐이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 188p”

이 책의 제목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이지만 결국 그들이 찢은 건 지독한 가부장제였다. 평등을 모르는 가부장제를 찢어버리고 나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개척한 길이었다. 이제는 꾸밈없이 캔버스 앞에 선 젠틸레스키처럼, 자신의 노화가 교정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라고 표현하는 테르부슈처럼, 여성도 얼마든지 후세에 지식을 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메리 커샛처럼 나 자신으로 살아보자.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젖어 든 가부장제를 알아채고 소모되는 뮤즈로 살지 않는 오늘이 우리에겐 절실하다. 또 모를 일이다. 우리가 가부장을 찢어버린다면 적어도 오늘보다 내일, 아직은 세상을 덜 살아본 여성에게 평등이라는 거대한 선물을 안겨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은 남성 캔버스에 가려졌던 여정,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이유리는 미술 분야 작가로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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