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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송전탑과 할매들

강남순 외 14인 저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 기사입력 2023.05.04 12:37
  • 최종수정 2023.05.04 12:57

밀양이라는 지명을 떠올리면 송전탑부터 떠오른다. 누구는 유명한 영남루를 떠올릴 테고, 누구는 끔찍한 성범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출장으로 딱 한 번 가봤던 밀양에서 나는 너른 풍경을 잠시 둘러보고 용건을 해결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송전탑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어느 풍경을 둘러봐도 송전탑만 떠올랐던 까닭이다. 뉴스에서 봤던 곳이 저기였나, 길쭉한 생선 가시처럼 생긴 송전탑이 내 눈에 걸려들까, 밀양에 머물렀던 하루 동안 내내 불편한 마음이 감돌았다.

밀양 송전탑 사건이 벌어졌던 때로부터 어느덧 10여 년이 넘게 흘렀다. 부지 선정은 2001년이었는데 주민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선 때는 대략 2008년이었다. 여전히 기억난다. 흙바닥에 드러누워 울부짖던 할머니들, 공사 관계자들을 거칠게 몰아붙이던 할아버지들. 그들의 얼굴은 모두 흙색에 가까웠다. 자신이 사는 지역을 지키는 방법이라고는 울부짖고 뜯어말리는 것 외에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그 당시 어르신 중에는 송전탑에 반대하며 분신자살한 분도 계셨다. 

(시금치)
(시금치)

그 까마득한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 건 강남순 외 14명의 저자가 쓴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를 읽으면서였다. 이 책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현시대에서 여성과 자연을 위협하는 현실을 지탄하고 삶을 회복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책 속에서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는 서울에서 숱하게 밀려나고 살 곳이 마땅치 않은 현실을 토로하며 밀양 땅을 지키던 할매들을 떠올린다. 할매는 나이 든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이 글 속에서는 투쟁의 주체이자 존경의 마음을 담는 용어로 사용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밀양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디어는 북극의 녹아가는 빙하 위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북극곰은 보여줄지언정 지역 주민들이 벌인 삶을 위한 저항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힘없이 죽어가는 북극곰의 모습은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지만, 간혹 뉴스 화면을 통해 보도되는 싸우는 주민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그 저항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무관심을 습득한 대가로 우리는 24시간 내내 터질 듯 밝은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긴 소매 옷을 걸치고 있다. - 99p”

나영 활동가는 여성과 자연, 주변부 지역이 착취당하는 밀양에서 타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의 패러다임을 발견한다. 어떤 엘리트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을 위한 자원 정도로 규정되는 바깥 집단이 있다. 그 바깥 집단은 자연을 짓밟힌 밀양이고 자원을 누리는 엘리트 집단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었다. 

비단 밀양만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가부장제의 착취는 전국 각지에서, 또 서울에서도 벌어진다. 송전탑으로 인해 자연과 주민이 상처 입는 곳은 전남 무안군과 영암군, 강원도 홍천군 등 나날이 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영 활동가처럼 끊임없는 도시 개발로 인해 정착할 곳 없이 계속 밀려나는 도시생활자 역시 가부장제의 구조에서 계속 주변화되고 자원화된다. 그는 집주인이 바뀌면 계약 기간이 남아도 무조건 집을 비워줘야 하는 세입자였고, 높은 빌딩과 초고층 아파트 단지에 밀려 외곽의 자그마한 방을 부지하는 처지이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가 밀양이다”를 외치며 부당한 일에 맞서 흙바닥을 구르는 할매들의 모습은 저자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한 것이다.

“오로지 생산성과 발전만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나의 노동은 어떠한 착취와 연결되어 있는지, 자신의 노동과 삶이 누구에 대한, 무엇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고, 서로를 연결하는 일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 106p”

밀양 송전탑 사건은 이제 흘러간 옛이야기처럼, 도심의 편의를 누리는 다수의 사람이 침묵함으로써 뭉개고 넘어가며 옅어지고 있다. 하지만 밀양에서 목격했던 착취의 순간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현대의 약자들, 도심에 사는 젊은 ‘할매’들, 도심을 제외한 주변 지역에서 진행 중인 가부장적 착취는 지금도 우리 일상의 복판에 송전탑을 세우고 있다.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는 여성은 물론 인간과 자연 전체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생명위기의 시대에서 다시금 인간과 자연의 ‘삶’을 회복하자고 말하는 실천적 사상, ‘에코페미니즘’에 대해 현장 운동가와 교수, 연구자 등 15인의 자기 성찰과 모색을 담은 책이다.

환경단체나 여성단체의 활동가, 농부, 교수, 연구자, 직장인 등 제각각 다른 배경과 이력을 가진 30대부터 60대까지의 필자들이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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