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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③남성중심 봉건사회를 고발한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가부장제 신랄하게 비판
'이혼고백서'와 정조 유린 소송으로 장안을 뒤흔들어
화가, 작가,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로 파란한 삶을 살아
조선 최초 신여성의 비참한 최후...행려병자로 사망

  • 기사입력 2022.03.08 06:30
  • 최종수정 2022.03.08 20:10

3월 8일은 여성들이 정치 사회 경제적 영역의 성차별에 대항해 투쟁해온 역사를 기리는 ‘세계 여성의 날’이다. 미국과 유럽, 한국 등의 현대사에서 많은 여성들은 참정권, 근로환경 개선, 동등한 임금, 지위 향상, 성범죄 엄벌 등을 주장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의 여성 노동자 1만5,000여 명이 “우리에게 빵(생존권)과 장미(참정권)를 달라‘고 외치며 대대적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해 1977년 유엔이 정한 날이다. 우리나라는 2018년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여성해방사에는 그 물꼬를 튼 첫 사람이 있다. 시대적 편견과 가혹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간 ’최초의 여성‘들의 삶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우먼타임스 = 심은혜 기자

“조선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1934년 대중잡지 ‘삼천리’에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과 남성 중심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기고 ‘이혼 고백서’가 실려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장안을 뒤흔든 나혜석의 ‘이혼 고백서’. (KBS '역사저널 그날')
장안을 뒤흔든 나혜석의 ‘이혼 고백서’. (KBS '역사저널 그날')

이제까지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던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이는 바로 나혜석(1896~1948)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시인, 독립운동가, 그리고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신여성이었다.

◇ 여자라서 이름이 없었던 아기

1896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이름이 없었다. 여성은 이름이 필요 없다는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갓난아기를 뜻하는 ‘아기’로 불렸다.

가부장 시대에 태어나긴 했으나 나름 깨어있던 아버지 나기정 덕택에 남자 형제들과 차별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이 있던 아버지, 그리고 어린 첩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그는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 제도에 의문을 품게 된다.

나혜석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했으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혜석은 1906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면서 ‘명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고, 진명여학교에 편입한 이후 ‘혜석’으로 개명한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그도 일본 유학을 떠나 서양화를 공부했다. 당시 여성이 유학하는 것은 흔치 않았던 터라 국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1935년 나혜석 작품 전시회. (KBS'역사저널 그날')
1935년 나혜석 작품 전시회. (KBS'역사저널 그날')

◇ 여성의 인권을 외치다

유학 중에는 교포 여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해 기관지를 내는 등 문필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14년에는 도쿄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상으로 일컬어지던 현모양처의 실체를 비판한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해 사회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고 비판하며 여자도 인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힘썼다. 그는 소설, 시, 희곡, 산문, 논설, 기행문, 감상문 등 모든 문학 분야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1917년 동경 여자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으며, 같은 해 6월 동경 여자 유학생친목회 기관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하고, 허영숙과 함께 편집위원을 맡는다.

1918년 3월에는 ‘여자계’ 2호에 그의 첫 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소설에서는 “첩이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한다”며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축첩의 관행을 비판했다.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던 나혜석은 1918년 말부터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자들인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함께 3.1 운동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그 자금조달을 위해 개성과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2·8 독립 선언에도 참여했던 그는 일본 경찰을 피해 귀국해 3·1 운동에 참여한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입수, 비밀리에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당한다.

이후 3월 5일의 만세 운동 사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그 뒤 3월 25일 다시 이화학당에서 만세 사건이 터지면서 ‘3·25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면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 (KBS'역사저널 그날')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 (KBS'역사저널 그날')

◇파격적인 결혼, 그리고 이혼

당시 그의 아버지는 나혜석에게 결혼을 강요했는데, 3·1 운동 당시 김우영이 그의 변호를 맡아주면서 그와 가까워졌다.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우영은 6년간 나혜석에게 구애를 해왔던 터였다.

그는 김우영에게 자신에게 과거에 남자(최승구)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래도 김우영이 이를 인정한다고 하자 다시 조건을 제시하는데, 두 번째 결혼이었던 김우영은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

당시 그가 내민 조건은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으로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1920년 25세에 결혼한 나혜석은 이듬해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했고, 전람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2년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전보돼 그를 따라갔고, 같은 해 제1회 조선미술회 전람회에 작품 ‘봄’과 ‘농부’를 출품했다. 이후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는 한편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나혜석이 조선미술대회에 입상하자 남편 김우영은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분개해 남편과 싸운 그는 자신의 그림이 남편의 명예를 높이는 도구가 된 것 같아 회의를 느낀다.

결혼 1년 만에 첫 아이를 낳은 그는 잡지 ‘동명’에 임신과 고통스러운 출산, 그리고 육아의 심경을 담은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라고 표현해 세간의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7년에는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남편은 독일 베를린에서 법률을,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최린(崔麟)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곡절을 겪게 된다. 최린은 한국 천도교 대표로서 3.1운동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유력한 정치인이자 개혁파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상과 취미, 예술에 있어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레스토랑과 오페라 극장, 뱃놀이를 하며 함께 연애를 했다. 남편 김우영은 이를 알게 됐고 1930년 부부는 이혼한다. 최린도 나혜석을 버린다. 이에 나혜석은 최린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그는 그림에만 몰두해 1933년에는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하는 등 재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이혼녀, 불륜녀라는 딱지가 붙어 사회적으로 버림받는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1935년에 구습과 인습에 얽매인 정조 개념의 해체를 주장하는 소설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했고, 1936년에는 소설 ‘현숙’을, 1937년에는 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다.

이혼 후 방랑생활을 하다 병을 얻게 된 나혜석.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혼 후 방랑생활을 하다 병을 얻게 된 나혜석.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그의 화가로서의 활동은 1935년 서울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가졌던 ‘근작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이혼 후, 조선뿐 아니라 일본, 프랑스에서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재기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나혜석의 집에 큰 불이 나 작품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1940년부터 방랑생활을 했다. 나혜석은 52세인 1948년 서울 시립자제원 병동에 입원, 한 달 만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자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깨어난 신여성 나혜석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가 태어난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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