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타임스 = 한기봉 편집인
우체국 택배 상자에 구멍을 뚫어 운반하기 쉽게 하는 일 하나에도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런 작은 일 하나마저 우리 사회는 모른 체 지냈다는 게 어찌 보면 부끄럽다. 택배업 종사 근로자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 택배 수요가 폭증하면서 올해 들어서만 10명이 과로사로 세상을 떴다.
정부와 국회가 모처럼 ‘일’을 냈다.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의 피부에 닿는 정책을 만드는 게 국회와 정부일 터인데, 그간 악다구니처럼 서로 정쟁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는 국민은 지쳤다. 정말 간만에 박수를 쳐주고 싶긴 한데, 그럼 그동안은 뭐했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24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마트노동자들이 무거운 상자를 수백 번씩 옮기느라 근골격계 질환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손잡이가 있는 상자를 이용하면 물건의 하중을 10% 이상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했다.
23일에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최고위원 등이 구멍손잡이가 없는 기존 택배상자와 구멍을 만든 상자를 직접 들어보며 비교해봤다.
지난 9일 출범한 민주당 소확행위원회는 이 사안을 최우선 과제로 올렸다. 위원회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의제였다. 우정본부 관계자는 “정부‧여당의 강력한 요구에 수익 감소로 인한 부담을 감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구멍 손잡이는 서울·강원 지역에 쓰인 5호 상자에부터 적용된다. 우정사업본부는 내년까지 적용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민주당 소확행위는 “5호 박스를 시작으로 조금 더 작은 4호 박스로 확대하고 정부기관이 아닌 주요 유통업체들도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런 기류에 맞춰 신세계그룹 이마트 매장은 지난달 PB상품(자체 브랜드 상품) 등에 구멍 손잡이가 있는 상자를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구멍 손잡이’는 배송 과정에서 상자 1개를 10번 이상 들어 올려야 하는 택배 종사자들의 오랜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나 비용이 문제였다. 내용물이 7kg 이상일 때 쓰는 5호 상자에 구멍을 뚫는 데 들어가는 추가 비용은 상자 1개 당 220원이다. 구멍으로 이물질이 들어올 수 있다거나 내용물이 들여다보이는 게 신경 쓰인다는 소비자들의 우려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의지의 문제였다. 국회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높은 분들이 문제를 제기하니 바로 해결됐다. 이리 간단한 걸 그동안 외면했다. 택배 상자에 구멍 손잡이가 없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