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㉟

알프스는“유럽의 등산 경연장” 이며 “세계적인 등반가들의 놀이터”로서 전혀 뒤지지 않았다.

  • 기사입력 2019.12.12 11:07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알프스alps라는 단어는 여러 사전적 의미를 떠나 산과 관련된 모든 주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서구 문명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원시 시대와 지중해 시대에는 유럽의 자연적인 성벽 역할을 했고 한니발이나 나폴레옹 시절에는 세계의 지도를 바꾸는 정복자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정치적인 역사 이외에 알프스는 사람과 영혼이 함께 개척하고 새로운 변방에 대한 도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지와 두려움의 극복, 모험에 따른 희생과 고통을 기록하는 근대등산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2세기 전만해도 유럽에는 등정된 산이 없었고 알프스의 초등시대에는 경쟁심과 시기, 질투, 실패와 비극적인 대참사로 얼룩진 시기였다. 하지만 그 역사는 왕이든 귀족이든 등산가이든 사람과 사람간의 갈등, 또는 사람과 산이라는 자연에 대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사람과 그 자신의 무지와 두려움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덜 중요하게 평가받았고 무시되었지만, 인간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깊은 신뢰를 줄곧 유지시켜 왔다.

알프스는 히말라야의 높이나 안데스의 넓이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의 등반가이며 철학자인 레슬리 스테판이 말했듯이 “유럽의 등산 경연장”, 또는 “세계적인 등반가들의 놀이터”로서 전혀 뒤지지 않았다.

알프스는 대부분 스위스에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3분의 1에 불과하다. 다른 3분의 1은 이탈리아에 나머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독일에 걸쳐 있다. 알프스는 수많은 지맥과 고개, 계곡으로 나라와 도시를 분리시켜 국민성과 언어, 경제활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등반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지역은 프랑스의 도핀 알프스다. 몽펠부, 레제크린, 라메이쥬가 대표적인데 끊이지 않는 화제와 경이로운 등반들로 드 소쉬르에서부터 젊은 등반가까지 자신들의 기량과 성취를 얻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었다.

몽블랑은 유럽 최고봉으로 세계의 등산사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몽블랑 등반은 지난 75년간 근대등반 기술의 발달과 광범위한 산악탐사 활동, 거봉 등정이라는 기록과 성과들을 양산해 왔고 프로 산악가이드를 탄생시켰다. 만년설로 이루어진 정상을 향해 20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는데 난이도가 높아 수준 높은 기량과 탁월한 체력을 요구한다.

샤모니에는 뒤플랑, 뒤미디, 다르장티에, 에귀 베르트 등 수많은 침봉들이 유명하다. 체르마트와 브레이유는 이 기간에 등산사에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이탈리아의 코르티나에 있는 돌로미테는 특이한 흥밋거리다. 알프스의 다른 산군과는 다르게 석회암과 깎아지른 외모, 스폰지처럼 푸석한 암질, 붉은 색깔의 바위는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곳에는 설벽이나 빙벽등반 코스가 없지만 놀랄 만한 수준의 암벽등반 코스가 침니와 크랙 등반기술을 요구하고 있다.

고대로마 시절에 알프스에 대한 기록은 브레너 고개와 성 베르나르 고개를 행군하는 군사 기록이 전부였고 등반에 관한 것은 없었다. 몬테비조만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산명이다. 로마인들은 정복자이거나 탐험가일 뿐이다.

알프스에 대한 기록은 13~14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났다. 최초의 완벽하고 공인된 등정은 1492년 도핀 알프스의 몽에귀 봉이다. 프랑스의 샤를르 8세의 명령에 의해 등정이 시도된 이 봉우리는, 높지는 않으나 절벽에 가까운 철옹성 같은 암탑이다. 최근의 등반 기술로도 상당한 기술적인 클라이밍이 필요한 대상지다.

르네상스 시기인 16세기에는 처음으로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탐사등반이 진행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기상 조사와 관측을 위해 페닌 산군을 탐사했고 콘래드 제스너와 조지아 시믈러가 스위스 북부 산군을 탐사등반 했는데, 이때의 기록이 최초의 산악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들이 오른 높이는 보잘 것 없었지만 사람들이 오랜 세월 알프스에 막연하게 간직했던 공포를 물리치고, 외경과 감동의 가슴으로 오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후 200년간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1725년 스위스의 산군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이 발행되었고, 그동안 사람의 삶과 사고방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과학과 산업혁명 등 시민사회로의 발전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산을 보는 시각과 비전이 점점 새로워졌다. 안내 책자가 빈번하게 출판되었고 발행부수가 늘어났고, 용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후와 꽃, 야생동물, 바위의 구조와 빙하 연구를 위해 산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1786년 몽블랑 초등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1700년 이후 몽블랑 초입과 빙하에 대한 조사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주로 크리스탈 채취업자나 영양 사냥꾼이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그들의 행위가 등산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산에는 용이나 악마들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을 따라 과학자와 여행가, 그리고 모험심으로 가득찬 영혼들이 산으로 들어갔다.

18세기 중반까지 몽블랑 산군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고 샤모니는 국제적인 휴양도시가 되었다. 이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던 사람들 중에 몽블랑 정상에 오르겠다는 열망을 불태운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가 호러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인데, 제네바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과학자로 명성이 자자했고 위대한 등산가로 평가받았다. 그의 몽블랑 프로젝트는 등산의 개념보다는 지질과 각종 관측 등 자연과학적 탐사로서의 비중이 더 컸다. 25년간 샤모니를 방문하면서 몽블랑 등정에 대한 욕망은 병이 되었고, 등산가라는 단어가 없을 때였지만 그는 이미 등산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드 소쉬르의 노력으로 등정에 대한 시도와 도전이 이어졌고 직업 산악가이드들의 경험과 기량이 월등해졌다. 그들이 산에서 부딪히는 절벽과 리지, 빙하와 폭풍, 추위와 외로움을 극복하면서 기록한 역사는, 결국 숭고한 등반가들의 영혼이 지어낸 감동 드라마였다.

1786년 미셀 가브리엘 파카드와 자크 발마가 몽블랑 초등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그들의 성공으로 인해 두려움 없이 고개를 들어 산을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고산에 대한 전설과 미신을 타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파카드는 샤모니의 의사였고 발마는 영농 지도사이자 크리스탈 채취업자였다. 두 사람은 교육 환경과 성장 배경이 달랐지만 등산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드 소쉬르가 자신들의 고향에서 진행하고 있는 탐사 열정에 감동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등정에 성공한 이후 갑자기 획득한 성공과 명성으로 달라진 발마는, 이 초등의 영광이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얻어진 성과라고 자랑하며 다녔다. 파카드는 불필요한 짐이었고, 심지어 파카드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이 소문은 훗날, 파카드의 선등으로 초등정이 성공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1787년, 드 소쉬르는 자신의 몽블랑 등정을 위해 발마가 이끄는 18명의 산악가이드와 함께 상당한 양의 장비와 식량, 과학 실험기구를 나누어 지고 출발했다. 그는 정상에 4시간 반가량 머물면서 각종 관측과 기록을 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출신인 파카드와 발마의 성공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과학자인 드 소쉬르의 성과는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산업혁명 이후 중상류층이 형성되었고 여행과 레져 수요가 늘어났으며, 사람들은 더 높은 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열차와 레일이 대규모의 관광객을 알프스의 샤모니와 체르마트, 그린델발트로 옮겨 놓았다. 루이 아가시즈가 빙하의 흐름과 지질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크게 진전시켰고 존 러스킨이 알프스 산악문학에 꽃을 피웠다. 등산을 주제로 한 멜러드라마 형식의 상업적 연극이 영국에서 6년간 롱런하면서 흥행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등산에 대한 붐이 일어났고 시대의 한 조류가 되었다.

1854년, 베터호른이 초등되면서 알프스의 황금시대가 열렸고 이후 10년간 100여 개의 처녀봉이 등정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등반가들은 알프레드 윌스, 레슬리 스테판, 존 틴달, 에드워드 윔퍼 등 대부분 영국의 엘리트 지식층으로, 알프스를 영국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최초라는 통계적, 수사적 가치보다는 도전의 대상으로 산을 선택했고 애착이 강했다. 이 시기에 로프와 피켈 등 장비가 개발되었고 루트 개념도가 그려져 있는 가이드북이 출판되었으며, 직업가이드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등산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등산인구를 늘리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857년, 영국의 알파인클럽 창설은 등산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알프스에서는 서로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경이로운 등반들이 시도되었고 몽블랑을 산악가이드 없이 신 루트로 오른다거나, 당시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바이스호른의 거대한 암탑을 오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들은 이런 행위들을 개인적인 도전과 성취, 영광으로 좇지 않고 모든 등반가들의 축적된 성과들을 한데 모아 발전을 거듭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알프스의 황금시대 초기에는 미등봉이 90%였지만 말기에는 90% 이상이 등정되었다. 1854년 이전의 사람들은 산을 단순하게 올랐지만 10년 후에 그들은 등반가가 되었고, 알프스는 근대등산운동의 요람지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만 안 본 뉴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