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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㉜

-등산의 역사는 산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 기사입력 2019.10.25 10:53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이 책은 1865년 에드워드 윔퍼가 초등한 마터호른 시절부터 찰스 에반스가 1955년 초등한 캉첸중가 시대까지 활동했던 등산가와 등반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당시 등산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을 살펴볼 수 있는데 앞으로 10회에 걸쳐서 알프스와 로키산맥, 안데스, 아프리카, 알래스카, 히말라야 등의 험지를 종횡무진하며 깨달은 등산의 본질과 의미, 산에서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산을 향한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소개한다.

“해가 지면서 붉은 노을이 티베트의 산록을 빠르게 물들인다. 한 승려가 초모랑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대자연의 장엄한 연출을 감상하고 있다. 그는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형상의 산을 올려다보며, 밤보다 더 깊은 신비와 두려움에 전율하고 있다. 저 산은 신神과 악마惡魔들의 거처다.

거대한 산 그림자가 빙하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유령들이 바람에 실려와 크레바스와 수직의 절벽에서 신들의 성역을 침범한 인간들을 향해 소란을 피우며 순진한 영혼들을 괴롭힌다. 어두워지고 있는 빙하 위로 두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얼음에 덮인 바위 지대를 조심스럽게 통과하고, 눈보라 때문에 허리를 거의 90도 숙이며 고통스러운 전진을 반복하고 있다. 헬멧과 고글, 커다란 배낭, 피켈을 손에 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도를 높이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제대로 머물 수 있는 우호적인 조건이 전혀 없는 황량한 리지를 응시할 뿐, 악령들이 저주하는 듯한 외침에는 관심이 없다. 어느 한 지점에 이르자 그들은 전진을 멈추었다. 체력이 모두 소진된 것이다. 한 사람이 뒤돌아서 하산한다. 또 다른 사람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피로와 절망을 짊어진 채 한동안 정상 부근을 응시한다. 그리고는 ‘조금만 더 기다려라, 우리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이니…’라며 꽁꽁 얼어붙은 입술을 움직인다. 이 젊은 등반가는 바로 영국의 지오프리 브루스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인간과 산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이 있다. “사람은 왜 산에 가는가?”이다. 하지만 대부분 확실한 대답을 못한다. 산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만큼 오래 되었지만 산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 충동과 욕망은 오래되지 않았다. 원시인이나 고대 사람들은 등산을 하지 않았다. 롱북 사원의 승려가 초모랑마를 바라보며 기도간을 돌리고 경전을 외우는 의식이나 미신들은, 종교의 세계가 현실 세계로 연결되는 가느다란 통로였다.

탐험과 모험정신은 근대 문명사회에서 일상사가 되었고 인류 역사의 추진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미지의 대륙이나 바다가 있으면 발견해내고 건너갔다. 미개척의 정글이나 사막, 산 어디든 지구 끝이라도 찾아가서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지평선 너머에는 도전과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예전에는 산을 미신과 공포의 대상으로 보았고 지구와 하늘의 중간에 있는 독립된 초자연적 공간으로 여겼다. 산에는 신과 악령들이 살고 있고 그 전설과 미신은 인종과 시대를 초월했다. 산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거처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등산의 역사는 주로 사람의 육체를 이용한 모험적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산에 올라갔는가와 바위와 빙벽, 로프와 피켈, 추위와 폭풍, 눈사태 등이 등산이라는 행위를 주로 구성했다.

하지만 등산에는 분명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숨어있다. 그 ‘어떤 것’이야말로 등산의 본질을 구성하고 등산의 가치와 등산사를 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초모랑마의 북동릉에 있었던 브루스와 롱북 계곡의 승려 사이에는 절벽과 빙하지대가 가로막아 수천 미터 떨어져 있었다. 브루스가 고도계나 심폐기능보다 더 확실하게 의지할 수 있는 확보장비는, “우리는 아직 거기에….”라고 했듯이 바로 그의 용기였다.

등산의 역사는 산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것은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고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인 모험정신의 역사인 것이다.

산에 대한 기록은 종교와 신화에서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산이라는 객체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아라라트의 노아, 시나이의 모세, 올리브와 골고다의 예수 등이 그 예다. 로마제국 시절에 최초로 등산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대부분 멀리서 바라보는 산이었지 올라가는 산은 아니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인류가 등산을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인간이 산을 대하는 방법이 바뀌면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과 괴테, 베토벤이 있었고 프랑스혁명과 민주주의,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때다. 정치와 과학, 예술 분야에 급속한 변혁이 닥치면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철학은 더 이상 고대의 전통을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공포의 대상이며 유럽의 중심이었던 알프스의 많은 봉우리가 새로운 등산기술과 정보로 도전의 대상이 되었고 등산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등산사의 초반에는 영국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곧 각국에 산악클럽과 원정등반대 등이 나타났다. 지금 히말라야에는 유럽은 물론 미국과 남미, 폴란드, 일본에서 많은 원정등반대가 몰려들고 있다.

또한 히말라야의 원주민이 등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변화다. 포터로 고용되어 경제적인 부를 획득하는 것 외에, 그들 자신이 등정하려고 도전하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셀파 텐징 노르게이는 네팔 국민들의 산에 대한 무지와 미신, 두려움을 떨치게 했고 즐거움과 긍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등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드 소쉬르에서 텐징에 이르기까지, 또는 원자력 과학자에서 농부까지 그들 각자 삶의 방식과 개성이 다르며, 그들의 목표와 성취도도 각기 다르다. 그러나 산 위에서 발휘되는 동료애는 크게 다르지 않다. 등산가는 왜 자신들의 안전을 뒤로 하고 폭풍과 추위, 치명적인 위험에 맞서 산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왜 걸어가려 하고 곤란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가? 봉우리나 빙하가 재산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돈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또 위대한 등반가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명예 때문만도 아닐 텐데 말이다.

“등산은 불필요한 행위다”라는 단정은, 현실적인 기준으로 볼 때 우연은 아니지만 등산의 본질이다. 그 목표가 돈이거나 명성, 권력이나 지식의 획득, 또는 승리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질과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도전’에 두고 있다. 자신의 약점과 무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등산에서 찾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독특한 체험을 하고, 인간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등산의 정신적인 가치는 등산전문가나 클럽만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산가나, 산 너머에는 어떤 도시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주말산행을 즐기는 하이커에게서도 그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산을 오르는 가에 있지 않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산을 오르는 가에 있기 때문이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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