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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㉙

-시간이 지나면서 의지가 약해졌다. 죽음의 문턱에 바짝 다가 선 기분이다.

  • 기사입력 2019.09.25 11:26
■라인홀트 메스너ㅣ출판년도 1999년ㅣ쪽수 276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2차 대전 후 히말라야에 몰아쳤던 국가적인 차원의 대규모 원정대의 목표는 정상 등정에 있었다. 이로 인해 등반이 제공하는 모험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가치는 무시되었고 변질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오르지 않고 산소보조 기구와 장비, 약물에 의존하는 등반가는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를 되풀이 했을 뿐이다.

산소마스크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장벽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공정하고 순수한 방법과 수단을 갖고 오르는 에베레스트, 이것만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의미의 등반 행위다. 산은 너무나도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장비와 도구를 이용해서 산을 등정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 자신의 의지를 최고의 장비로 선택한 등반가만이 자연과의 오묘한 조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메스너)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에 노출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체력과 능력을 위해 훈련과 준비를 할 것이다.”

1978년 3월 21일, 11명의 오스트리아 에베레스트원정대는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는 처음부터 무산소 등정을 계획했다. 메스너는 자신에게 “왜 무산소로 도전을 하려는가”며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 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자연의 품속에서 한없이 어리고 약한 사람,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 치명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고독과 고도에 맞서 이겨 내려는 사람이 최고의 관심사였다.

고도를 높일수록 자기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더 깊게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진보적인 장비와 산소 마스크를 등반가와 산 사이에 개입시킨다면 8천미터 이상에서의 진정한 등반은 실현될 수 없다. 외부의 도움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의 곤란함과 고립감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7천미터가 되었든 8천미터가 되었든, 심지어 정상 바로 밑에까지 도달해도 과감히 하산할 수 있었다. 산소 마스크를 이용해서 무리하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순수한 방법으로 오른 고도까지의 경험이 그에게 소중했고, 산소 마스크는 고도를 낮추는 역할만 할 뿐이다.

3월 27일, 아이스폴 루트 개척을 위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었다. 메스너와 피터는 혼돈과 무질서, 기묘하고 위험한 얼음탑과 크레바스 지대를 통과하며 6,100미터 지점에 캠프1을 설치했다. 셰르파들의 사고와 눈사태 조짐으로 등반이 지연됐으나 4월 13일, 사우스콜 밑의 7,800미터 지점까지 루트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계속된 긴장과 추위로 지친 메스너는 제네바 스푸르에 이르러 곧바로 하산했고 베이스캠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베이스캠프에서 피터와 그는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대망의 1차 등정 시도를 준비했다. 메스너는 이 산에 순조롭게 적응되었고 어느 때보다 강한 신념과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도전하는 행위는 유토피아의 공상일 수도 있다. 그는 이 등반의 성공으로 어떤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것이 결코 개인적인 환상만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등정에 대한 기대로 더욱 긴장이 되었다. 4월 20일, 사우스콜에 도착했지만 시속 200km의 강풍과 영하 40도의 추위가 피터와 셰르파 두 명을 하산시켰다.

메스너는 단독으로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대기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지가 약해졌다. 죽음의 문턱에 바짝 다가 선 기분이다. 강풍은 허리케인으로 바뀌었고 손가락과 코에 동상의 징후가 보였으며, 얼굴은 고드름과 얼음으로 코팅되었고 시야마저 흐릿해졌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졌고 이 죽음의 지대에서 꼼짝 않고 보낸 50시간을 뒤로 한 채 하산을 결정했다. 몇 년이 지난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틀간의 하산으로 캠프2에 도착한 메스너는 탈진 상태가 되었고 기억상실 증세도 나타났다. 의기소침해서 밤새 뒤척였고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갔다.

5월 3일, 메스너와 피터는 장비와 식량을 챙기고 캠프4로 향했다. 과연 “산소없이 등정이 가능할까”라는 명제는 그들을 밤새 괴롭혔고 사우스콜의 악천후로 악몽의 밤을 보냈다. 피터가 산소통을 가지고 가자고 우겼다. 하지만 메스너가 “by fair means”라는 그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피터를 설득했다. 이 상태로 등정에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희미했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오를 수 있는 고도까지 무산소로 가기로 했다.

산소의 도움없이 발생할 수 있는 온갖 곤란과 위험, 고통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산소통은 에베레스트의 고도를 6천미터로 낮추는 역할만 한다. 피터와 메스너는 15년간 파트너로 산에 다니면서 서로의 등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믿음이 깊었다. 머리에 이상한 징후가 보이든가 체력에 자신이 없을 때는 지체없이 하산하기로 했다. “산소없이 취침을 해도 아침에 아무 이상없이 깰 수가 있을까”라는 상념에 밤이 고통스럽다.

5월 8일, 새벽 3시에 기상한 그들은 캠프5에 10시에 도착했고 계속 고도를 높였다. 하지만 희박해진 공기로 전진이 더디었고 판단이 흐려졌다. 서로가 대화를 나눌만큼 공기가 충분치 않아 눈 위에다 피켈로 사인을 표시하면서 의사소통을 했다. 서로가 확보도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였고 휴식을 취할 때도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인식했고 상대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움직였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고 절정에 다다랐다. 오르는 행위가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 어떤 감정도 감동도 없었다. 지금 자신들이 에베레스트에 있다는 사실도, 무산소로 오르고 있다는 현실적인 그 어느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의 궁극적인 정점,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어렴풋한 환상만이 그들을 지배했다.

정상에 이르자 그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곳이 정상인지 여부는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정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피터가 다가오자 메스너는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은 극도의 긴장과 고통을 이겨 내고 오른 의지에 대한 보상의 표현이었다. 인류 최초의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순간이다. 메스너는 무언가 완수했다는 뿌듯한 감정을 경험하며 피터에게 경의를 보냈다.

그는 앞서 내려가는 피터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오래도록 간직했던 자신의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린 슬픈 날이다. 꿈이 이루어진 뒤의 허전함을 메울 새로운 계획이 아직 그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남겨진 공허를 메우기 위해 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로 했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꿈을 찾아 놓을 것도 다짐했다.

글ㅣ호경필(에코로바 커뮤니티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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