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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으로 본 한국 화장 문화사

  • 기사입력 2019.05.07 16:58
(사진=픽사베이)

봄 시즌에 화사한 색상의 ‘립스틱’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이다. 이에 여자의 ‘봄’은 ‘립스틱’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있다. 올 봄은 볼, 눈, 입술 등에 선명한 컬러를 입혀 화사하게 생기를 주는 원 포인트 컬러 메이크업이 유행할 전망이다. 그 중에서 립 포인트 메이크업은 쉽게 여성의 분위기를 바꾸어주는 제품이다. 

립스틱은 
그저 밀랍에 색깔을 입혀 통에 담은 물건이 아니다. 
립스틱은 요술지팡이고, 마약이다. 
립스틱은 몸의 일부다. 
립스틱은 곧 개성이다. 
립스틱은 여자의 무기이기도 하다.  -립스틱 뒷표지글-

2003년 한 출판사에서 립스틱(제시카 폴링스턴·Jessica Pallingston)이란 책을 번역해 출간하면서 한국 여성의 입술화장사를 책자에 같이 싣고 싶다며 원고를 청탁해왔다. 이에 립스틱 책자 뒷부분에 ‘수산리의 귀부인, 잇꽃 연지를 바르다’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한국 화장사와 한국 립스틱 역사 원고를 쓴 적이 있다. 이 원고를 간추려 한국 여인의 입술 화장법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미인의 조건 중 삼홍(三紅)이 있다. 삼홍은 볼과 입술 및 손톱이 붉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일찍부터 연지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연지는 잇꽃(紅花)으로 만드는데, 4월 초에 씨를 뿌리면 1미터 높이까지 자라 6월쯤 엄지손가락 마디만한 꽃망울이 맺힌다. 7월 초가 되면 사나흘 사이에 꽃잎이 활짝 피는데, 처음에 노랗게 핀 꽃잎이 이윽고 붉어지자마자 꽃을 따 연지를 만든다. 

홍염. 잇꽃 말린 것(사진=한국콘텐츠진흥원)

예쁜 연지를 얻으려면, 꽃잎이 시들거나 색깔이 변하기 전에 따야 한다. 그래서 꽃을 따는 시간은 낮보다 이슬이 채 마르기 전인 새벽이 좋다. 따 모은 꽃은 절구에 찧어 꽃물을 없애며, 꽃잎을 찧는 절구는 돌이나 나무가 좋다. 쇠 절구는 붉은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꽃물을 뺀 잇꽃은 마치 깻묵덩어리 같다. 이것을 그늘에서 말리고 비벼 가루로 만들고 거기에 다시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과정을 세 번쯤 거듭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루를 체로 쳐서 고운 가루를 한나절쯤 햇볕에 말린다. 이 가루가 바로 연지의 원료다. 이 가루를 환약처럼 만들어서 기름에 반죽해 바른다. 

잇꽃의 색소는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립스틱의 원료로 쓰여 왔다. 고구려 시대에는 연금술이 발달하여 광물질인 주사(朱砂)를 사용하기도 했다. 주사를 이용해 붉은색으로 글씨나 그림과 벽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화장품 원료로도 사용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붉은 안료들은 점성이 없으므로 적당량의 동물기름이나 식물성 기름을 첨가해서 사용했으며, 이는 입술에 착색이 잘 되고 방수효과와 색채의 광택과 윤기를 더하게 했다. 

뺨과 입술을 연지로 단장한 수산리 벽화의 귀부인 
신라 사람들은 상당한 수준의 연분(鉛粉)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한 문헌에는, 692년에 신라의 한 스님이 연분을 만들었기에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는 그 이전에 이미 연분의 제조가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기록이다. 이 연분은 화장품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일반적으로 분(粉)은 쌀과 서속(黍粟: 기장과 조)을 재료로 한 것이다. 신라인은 이것들을 곱게 갈아 얼굴에 발랐다. 또 조개껍질을 태워 빻은 가루, 백토(白土), 돌(滑石)가루나 분꽃씨 가루를 빻아 바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부착력이 좋지 않아 피부에 잘 발라지지 않고 쉽게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이에 반해 연분은 납 성분 때문에 피부에 잘 발라진다. 그러나 연분에는 납중독으로 털구멍이 커지고 낯빛이 푸르게 변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부터 연분 제조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연지(嚥脂)는 볼과 입술을 붉게 치장하는 화장품을 말한다. 이마에 동그랗게 치레하는 것은 곤지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연지를 쓴다. 화장품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 바로 연지다. 

연지의 기원은 기원전 1150년경 중국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연지를 썼는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를 발랐고, 5∼6세기경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 벽화에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바른 귀부인상이 있으므로, 대략 1,500년에서 2,000년 전쯤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수산리벽화 여인들의 행렬(사진=동북아재단)

수산리 벽화의 귀부인상은 볼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되고 눈썹도 눈길이 정도로 가늘면서 약간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쌍영총 고분 벽화도 여관(女官) 또는 시녀로 보이는 여인들이 연지를 바르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무녀와 악공도 연지 화장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이마에 연지를 동그랗게 그렸다고 한다. 

고려 기생의 분대화장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화장 문화를 계승, 발전시킴과 동시에 귀족문화의 영향으로 쾌락을 즐기는 탐미 주의적 색채가 짙어졌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남녀가 개울에서 한데 어울려 목욕하고 하루에 서너 차례나 목욕할 만큼 깨끗한 몸을 지니기 위해 노력했다. 

고려의 화장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것은 기생들이었다. 기생 화장이 퍼지게 된 것은 태조 왕건 때 기생학교 교방(敎坊)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 8대 현종 때는 기생들에게 분대(粉黛: 백분과 눈썹먹)화장 또는 유두분면(油頭粉面: 기름칠한 머리와 분 바른 얼굴)의 화장법을 가르쳤는데, 그녀들은 머리에 기름을 번지르르하게 바르고 분을 두텁게 발랐으며 눈썹은 푸르게, 볼연지는 붉게 칠했다고 한다. 고려 기생의 분대화장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기생들은 판에 박은 듯 분대화장을 했고, 점차 진하고 야해져 화장한 여자를 ‘분대’라고 부를 만큼 분대화장의 영향은 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기생으로 오해 받기 싫은 여염집 규수와 부인들은 평상시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 연회나 나들이 때만 화장을 함으로써 분대화장을 기피했고, 분대화장은 더더욱 기생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이원화된 화장 문화는 사실 고려 때 싹튼 것이었다. 

한편 고려는 원나라에서 공녀(貢女)를 요구한 1274년부터 공민왕 때까지 약 80년 동안 50여 차례에 걸쳐 과부와 처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공녀로 뽑혀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조혼 풍습을 만들어냈고, 여자들은 아름다움은커녕 여자처럼 보이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화장은 부인네나 기생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것 역시 조선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인도. 조선 후기의 화원인 신윤복이 그린 여인의 모습. (사진=간송미술재단)

『규합총서』의 열네 가지 입술연지 바르는 법 
조선시대에는 ‘문란’한 고려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윤리관이 확립되었다. 여염집 규수들의 평상시 치장은 고려시대보다 훨씬 담박해졌고, 부드럽고 은은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연지를 그리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꾸는 아름다움, 이것이 조선시대의 화장이었다. 

숙종 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는 화장품을 가가호호 방문 판매하는 상인 ‘매분구’(賣粉嫗)가 있었다. 출입의 자유가 없었던 조선시대 여인네들이 화장품과 화장 문화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매분구나 방물장수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보통은 가정에서 직접 화장품을 만들어 썼는데, 그것은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실린 여러 가지 향 및 화장품의 제조방법에서도 알 수 있다. 

『규합총서』에는 여러 가지 머리모양, 열 가지의 눈썹 그리는 법, 갖가지 입술연지 바르는 법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것이 눈썹이므로 눈썹의 형태를 매우 중요시 여겨 눈썹 화장에 신중해야 한다는 내용, 또 겨울에는 얼굴이 거칠어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김이 새지 않도록 두껍게 봉한 뒤 한 달쯤 두었다가 얼굴에 바르면 트지 않을뿐더러 윤이 나고 피부가 옥같이 희어진다는 기록도 보인다. 

입술연지 바르는 법은 열네 가지 명칭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연지는 그 농담의 차이에 따라 명칭도 각기 달랐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석류교(石榴嬌), 대홍춘(大紅春), 눈오향(嫩吳香), 반변교(半邊嬌), 만금홍(萬金紅), 성단심(聖檀心), 노주아(露珠兒), 내가원(內家圓), 천궁교(天宮巧), 낙아은담(洛兒殷淡), 홍심(紅心), 성성훈(猩猩暈), 소주룡격쌍(小珠龍格雙), 당미화노(唐媚花奴)등이 있다. 입술 화장하는데 지금보다 더 많은 종류의 입술 연출법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기생이나 궁녀와 여염집 아낙의 화장법이 달랐다는 것은 위에서 쓴 대로인데,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안고 있었던 이원적인 여성관이 깔려 있기도 했다. 아내와 며느리로는 건강하고 성격 원만하며 인내심 강하고 골격과 인상이 후덕한 여성을 으뜸으로 여겼지만, 소실이나 기생으로는 옥같이 흰 살결, 초승달같이 가는 눈썹, 삼단같이 치렁치렁한 숱 많은 머리, 복숭앗빛 뺨, 앵두빛 입술, 가늘게 흐르는 시내처럼 가는 허리, 그리고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낭랑한 목소리의 여인을 최고로 쳤다. 

한국 화장 문화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흰 피부를 선호하고 미남미녀를 존숭하는 경향이 있었다. 분, 눈썹 묵, 연지 화장을 주종으로 한 메이크업의 전반적인 흐름이 고려의 화려하고 퇴폐적인 화장 이후로는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을 주류로 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생 중심의 화장술 보급과 고려시대 공녀의 폐해 등으로 인한 화장 기피 및 화장 문화의 이원화가 오늘날까지 여성들의 잠재의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세계의 수많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한국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한국 여성들이 화장을 완벽하게 하며 멋을 알고 끼가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한다느니, 멋에만 너무 치중한다느니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물론 둘 다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를 주장하고 개성화, 차별화를 부르짖는 시대다. 다양한 화장품과 색조를 활용해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메이크업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나만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도전할 차례다. 올 봄 화사한 색상의 립스틱으로 더욱 아름답게 변신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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