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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레터] '노회찬의 장미 한 송이' 기억하십니까?

  • 기사입력 2023.03.08 16:32
  • 최종수정 2023.03.08 16:38

우먼타임스 = 한기봉 편집인

그가 떠난 지 벌써 5년, 그래도 그의 붉은 장미는 18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 땅 여성 노동자들의 거친 손에서 피고 있습니다.

노회찬 재단은 ‘세계 여성의 날’인 8일을 맞아 올해도 어김없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회찬의 장미 한 송이’를 선물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6411번 시내버스 첫 차를 타고 강남 일터로 가는 청소 노동자, 국회 청소 노동자, 국회 출입기자, IT 회사 노동자, 지방의 대리기사들입니다.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서는 장미와 함께 전태일의 ‘빵’을 나눠주었습니다.

‘노회찬의 장미’는 그가 2005년 국회의원이 된 후 처음 맞은 세계 여성의 날에 국회 여성 청소 노동자들에게 한 송이씩을 선물한 것이 시작입니다.

고 노회찬 의원이 20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트위터에 올린 축하 메시지. (노회찬 재단)
고 노회찬 의원이 20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트위터에 올린 축하 메시지. (노회찬 재단)

장미 한 송이가 뭐 대수이겠습니까. 붉은 장미 한 송이가 역사를 바꿀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상징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붉은 장미에는 여성해방운동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습니다.

1908년 3월 8일 뉴욕의 럿거스 광장에서 2만여 명의 여성 의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기 위해 뛰쳐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이라고 외쳤습니다. 빵은 육체적 양식인 생존권, 장미는 정신적 양식인 참정권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빵과 장미는 세계적으로 여성운동의 상징이 됐지요.

노회찬은 생전에 “3월 8일을 어떻게 기념하는가를 보면, 그 나라의 여성관을 알 수 있다. 밸런타인 데이는 알아도 이날은 모른다는 제 조카 같은 대학생이 더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며 이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외롭게 외쳤습니다. 그의 소망은 그가 세상을 뜬 2018년 이뤄졌지요. 유엔이 1977년 세계 여성의 날을 선포한 지 41년 만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지요. 대통령도, 장관도, 대기업 회장님도 장미 한 송이를 선물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노회찬의 장미는 어둡고 열악한 노동현장을 찾아 배달됐습니다. 새벽부터 강남의 빌딩 화장실에서 노란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를 닦는 아주머니, 종일 성희롱성 전화에 시달리는 콜센터 직원, 코로나 돌봄으로 심신이 지친 간호사, 종일 미싱을 돌리는 봉제공장의 이름 없는 여성 노동자 수천여 명이 이날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받았습니다.

3월 8일 새벽 4시에 구로동 거리공원정류장에 가면 노회찬이 있었습니다. 강남으로 가는 시내버스 6411번의 시발점이죠. 승객 대부분은 빌딩 청소를 하러 가는 여성 노동자들입니다. 노회찬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너털웃음으로 장미를 건네주며 그들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지금은 노회찬 재단이 그 일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혹시 그의 명연설 ‘6411번을 아십니까’를 기억하십니까.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입니다.

“이 버스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탑니다. 한명이 어쩌다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 원 받는 이 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 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노회찬의 촌철살인 중 가장 유명한 어록은 이 말이죠.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세계은행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발표한 ‘여성, 기업, 법’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남녀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제도가 세계 190개 국 최하위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우리보다 낮은 점수를 기록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수단, 이집트, 기니비사우, 아제르바이잔 등 9나라뿐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은 “지금의 개선 속도로는 완전한 법적 성평등 구현까지 최소 50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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