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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아저씨에겐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마쓰다 아오코 저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 기사입력 2022.12.26 11:50

우리 사회에서 ‘개저씨’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열광했다. 나는 후자였다. 사는 동안 경험한 께름칙하고 불쾌했던 아저씨들을 그저 ‘아저씨’라는 커다란 범주로 묶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중엔 선량한 보통의 아저씨들이 있고, 아재라 불러도 부담 없는 재미있는 존재들도 있었다. 그래서 불쾌한 자들을 정확하게 분류한 개저씨라는 단어에 통쾌함을 느끼곤 했다. 물론 이 고백을 듣는 개저씨는 나를 미워하겠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음이다.

그런데 너무나 웃긴 소설을 하나 발견했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개저씨와 비슷한 개념을 다룬 책이 있었다. 마쓰다 아오코의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이었다. 지속가능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생태계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게 영혼에 적용이 가능하다니, 싶은 생각으로 시작한 책은 뜻밖에 아저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에서 말하는 아저씨는 다음과 같다. 

마쓰다 아오코 저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한스미디어)
마쓰다 아오코 저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한스미디어)

“하나, ‘아저씨’는 겉모습과 상관없다. 하지만 겉모습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경우가 확연히 많다.
하나, ‘아저씨’는 이야기를 나눠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하나, 본인이 ‘아저씨’라는 사실을 아무리 숨기려 해봤자 소용없다. 가면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벗겨진다. 
하나, ‘아저씨’는 나이와 상관없다. 아무리 젊어도 속에 ‘아저씨’를 탑재한 경우가 있다. 
하나, ‘아저씨’ 중에는 여성도 있다. 이 사회는 여성도 ‘아저씨’가 되도록 장려한다. ‘아저씨’ 급으로 행동하는 여성은 ‘아저씨’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114p”

이 익숙한 아저씨의 특성은 아저씨들이 주로 착취하고자 하는 여성, 그중에서도 소녀들일수록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여성을 출산의 대상 혹은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 여성이 목소리를 높이면 질타받는 사회, 여성의 성 착취가 만연한 사회를 주름잡는 상징이 바로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아저씨의 눈에 소녀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저씨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난다. 소녀들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들은 전철에서 빈자리인 줄 알고 앉았는데 소녀 위에 철퍽 앉거나, 무리 지어 등하교하는 소녀들에 부딪혀 휘청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언짢아지기도 했다. 

“그들에게서는 어떤 커다란 즐거움을 빼앗긴 듯한 불만이 느껴졌다. 잿빛 일상에 꽃을 곁들여주던 요소가 사라져버림으로써 ‘아저씨’의 불만은 커져갔다. 업무 태도가 눈에 띄게 불성실해졌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저씨’가 확연하게 늘어났다. - 13p”

소녀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소녀들을 주시하는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낀 것이다. 뺨에, 목덜미에, 가슴에, 교복 치맛자락에 엉겨 붙던 끈적한 시선이 사라지자 소녀들은 ‘해방’되었다. 물론 이 믿기지 않는 설정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는 회사에서 정규직 남자직원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쫓겨난 계약직 게이코와 비정규직 여직원들이 연대하며 현실의 벽을 깨뜨리는 지난한 전쟁이 벌어진다. 현재와 미래 시점의 이야기가 반복되며 아저씨에게 소녀가 보이지 않는 미래의 교차점을 향해 이야기가 나아간다.

나는 미래 시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우리나라에 적용해 상상해봤다. 아저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녀들. 한때 소녀 시절을 거쳐 성장한 일생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나는 얼마나 상쾌한 기분으로 학교에 다니고 해 질 녘에도 당당하게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아저씨의 입장에서는 보는 즐거움이 줄었다고 항의했을까. 자신은 나이가 들었지만 위트가 있고 외모가 괜찮게 유지된 편이라 착각하며 젊고 어린 여성들을 희롱하던 그들 말이다.

만약 책 속에 나오듯 소녀가 아저씨에게 보이지 않는 상황이 실재했다면 확신할 수 있는 게 있다. 책의 제목처럼 내 영혼은 지속가능한 상태로 말끔하게 보존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값어치를 숫자로 잴 수 없는 소중한 영혼이 손상되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됐을 거란 상상만으로 나는 가슴속이 쾌청해졌다. 기분이 푸르러졌다. 소설 속에서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었던 지속가능이었다.

“영혼은 닳는다. 게이코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언제쯤이었던가. 영혼은 지치고, 영혼은 닳는다. 영혼은 영원히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불합리한 일을 겪거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영혼은 닳는다. 영혼은 살아 있으면 닳는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을 오래 지속시키며 살아가야 한다. - 129p”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는 굴레에 저항하기로 한 게이코가 여성 아이들을 최애로 삼고 그 에너지를 발판으로 다른 여성들과 새로운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저자 마쓰다 아오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아줌마들이 사는 곳>으로 미국 파이어크래커상,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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