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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이미 흠집난 삶이라해도

구병모 저 ‘파과’ 

  • 기사입력 2022.11.29 17:30
  • 최종수정 2022.11.30 14:41

만약 살인청부업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날렵한 몸에 매서운 눈빛, 흔적을 남기지 않는 짧은 머리, 젊은 나이, 그리고 직관적으로 남성을 상상할 터다. 사실 나도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읽기 전까진 그 전형적인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형성을 벗어난 작중 인물은 65세 여성 킬러 ‘조각’이다. 조각이라는 인물을 읽으며 나는 신선함과 충격에서 내내 헤어나오질 못했다. 킬러라면 당연히 젊은 남성일 거라 생각한 건 왜일까? 간호사와 피아노학원 선생님을 당연히 여성이라 생각하듯, 게임 개발자와 트럭 기사는 당연히 남성이라 생각하듯, 킬러라는 특수한 설정에서도 선입견이 발동했나 보다. 

구병모 저 ‘파과’ (위즈덤하우스)
구병모 저 ‘파과’ (위즈덤하우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 48p”

40년간 청부살인을 직업으로 삼은 조각은 의뢰받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왔다. 하지만 나이를 빗겨 갈 순 없었다. 보통의 사람처럼 킬러인 조각도 노화한다. 몸이 점점 쇠잔해지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조각은 분명 노인이 됐지만 그렇다고 일(?)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라 현역과 소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지낸다. 게다가 ‘투우’라는 청부업자가 들어오면서 수시로 위협당한다. 늙고 병든 처지라 무시당하지만, 직업 특성상 평범한 할머니로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게 애매하게 무너져가는 조각의 모습은 흠집 난 과일과 다를 바 없다. 

“꼭 개라서가 아니다. 사람한테라고 다를 바 없지. 늙은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늙은이는 질병에 잘 옮고 또 잘 옮기고 다닌다는… 누구도 그의 무게를 대신 감당해주지 않는다는. 다 사람한테 하듯이 그러는 거야. 너를 잘 돌봐주진 못했어도 네가 그런 지경에 놓이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죽어서도 마음이 불편하겠지. 그러니 언젠가 필요한 때가 되면 너는 저리로 나가. 그리로 어디로든 가. 알겠니.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로 분류되기 전에. - 138p”

조각의 삶은 예리하고 민첩한 킬러의 삶이 아니다. 늙고 병들고 위태로운 여성 킬러의 삶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우리 주변 할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지만 일을 놓지 못하는 상인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도 꾹 참고 자녀의 자녀를 키워내는 할머니들, 홀로 남겨진 쓸쓸한 일상을 견디는 독거 할머니들, 동정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파지를 줍는 할머니들. 사회의 최약자로 차별받는 노인과 여성의 모습이 조각의 삶에 모두 드러나 있다. 특히 느지막이 지키고 싶은 존재가 생기자 목숨을 거는 모습은 우리에게 헌신해왔던 보통의 할머니와 닮아있었다.

그 모든 삶은 부러 만들고 선택한 게 아니다. 그저 태어나 주어진 여성의 삶, 살다 보니 어느새 나이 들고 약자가 되는 삶에 들어서는 것이다. 과일이 맺힐 때부터 부서지고 흠집 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나이 든 여성의 삶은 의도치 않게 파과가 될 뿐이다. 
애증의 복수를 계획한 투우에 의해 조각은 왼쪽 손을 잃는다. 흠집이 거하게 난 파과다. 그래도 조각은 남은 한 손에 난생처음 화려한 네일케어를 받는다. 피하지방이 없는 메마른 손등과 그 끝에 빛나는 다섯 개의 손톱을 꾸민다. 이제 세상과 이별할 순간만을 기다리는 노인이지만 잠시나마 반짝이다 사라질 것에 마음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파과>는 상처 입고 이미 글러버린 삶이라 자책하는 누군가에게 꼭 쥐여 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342p”

<파과>는 한국 소설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60대 여성 킬러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여성 서사를 써내려가며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구병모의 소설이다. 

저자 구병모는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 <파과>,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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