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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짚기] 괴롭히는 전화 안 받았더니, 스토커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

전 남친이 석 달간 집요하게 전화…법원 “안 받으면 스토킹 범죄 성립 안돼”
인천지법, 20년 전의 대법원 판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대법원 판례 “휴대전화 벨소리가 정보통신망법상 ‘음향’에 해당하지 않아”
일부 법조계와 여성단체 “지나친 법 기술적 해석"
“스토킹 피해의 맥락을 제대로 들여다 봐야”

  • 기사입력 2022.11.10 15:15
  • 최종수정 2022.11.10 15:22

우먼타임스 = 한기봉 기자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다시 만나달라며 수개월간 하루에도 수십 차례 전화를 걸어대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영상통화를 시도했다.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문자까지 보냈다. 두려움에 떨지 않을 여성이 있을까.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다른 사람의 전화나 전화번호가 뜨지 않는 발신번호 표시제한 기능을 이용해 전화를 계속 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여성은 참다못해 법원에 접근금지 명령을 신청했다. 법원은 여성의 집 100m 이내 접근하지 말고, 전화를 걸지 말라는 잠정조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허사였다. 여성은 결국 전 남친을 스토킹 혐의로 고소했다.

법원(1심)의 판단은? 누구나 당연히 유죄 판결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일반적 국민 정서와 정반대로 나왔다. 스토커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왜 무죄 판결을 내렸을까. 그 판단의 법적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피해 여성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데 있다.

[법원 판결]

가해자 남성은 A씨(54)고 피해자 여성은 B씨(42)다. A씨는 지난 3월 26일부터 6월 3일까지 B씨에게 반복해 전화를 걸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하루에 4시간 동안 10회에 걸쳐 연속으로 전화를 건 적도 있다.

인천지법 형사9단독 정희영 판사는 최근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이렇게 밝혔다.

​“A씨가 전화를 걸었지만, B씨가 통화를 하지 않았다. 상대방 전화기에 울리는 벨 소리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송신된 음향으로 볼 수 없다. B씨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표시됐더라도 이는 휴대전화 자체 기능에서 나오는 표시에 불과하다. A씨가 B씨에게 도달하게 한 부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즉, B씨가 실제로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토킹 범죄가 이뤄진 게 아니라고 본 것이다.

법원은 휴대전화 벨소리가 정보통신망법상 ‘음향’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2005년 대법원 판례를 판단 근거로 삼았다. 대법원은 당시 같은 사안에 대해 무죄로 판시했다.

스토킹처벌법 제2조 제1항 제1호는 스토킹을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물건이나 글·말·음향·그림·영상·화상을 도달하게 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번 판결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일반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넘어갔다. 과거 유사 재판에서도 피고들은 이번 사건과 같은 논리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피해자가 수신거부를 해놓아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시 2005년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법원은 한편 A씨가 B씨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직장에 찾아가 스토킹을 한 혐의, 과거에 B씨를 폭행한 혐의에 대해서도 공소 기각 판단을 내렸다. 기소 후 B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 불벌죄다. 법무부는 현재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는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한편 인천지검은 “법원이 무죄로 판단한 부분은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며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스토킹 범죄는 수법이 진화하고 있으나 관련법은 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스토킹 범죄는 수법이 진화하고 있으나 관련법은 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법원 판결에 대한 반발]

이번 판결이 보도되자 온라인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일부 법조계와 여성 관련 단체들도 ‘비상식적 판결’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일반의 반응은 무엇보다 ‘피해자가 전화를 안 받았다고 가해자가 무죄’라는 판결의 핵심에 납득이 안 간다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스토커를 처벌받게 하려면 스토커의 전화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건가”라는 반응이 가장 많다.

법조계 일부에선 이번 판결이 사회적 분위기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법원 판례에 집착하지 말고 스토킹처벌법이 강화돼 가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실제로 전화를 받아야만 가해자 행위가 범죄가 성립된다는 논리라면, 피해자에게 무조건 그 고통을 감내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다.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스토킹 범죄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데다 거의 20년 묵은 대법원 판례를 인용한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인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는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법을 해석했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온라인을 이용한 새로운 유형의 스토킹이 증가하는 현실에 맞춰 관련 법이 정비돼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재판부도 기계적으로 법령을 해석하기보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변화한 스토킹 인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아울러 국회가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유감 성명]

이번 판결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단체는 한국여성변호사회(여변)다.

여변은 8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판결은 스토킹을 정의한 법 규정을 지나치게 법 기술적으로만 해석해 스토킹 피해의 맥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정보통신서비스 이용자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정보통신망법과 스토킹범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스토킹처벌법의 입법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스토킹처벌법의 입법 목적, 문제 되는 정의 규정에 관한 면밀한 검토와 피해자 관점의 판단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기를 기대한다”며 “현행법이 스토킹 행위 유형을 다섯 가지로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어 현실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스토킹 행위를 제대로 포함할 수 없으니 국회 차원에서 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변은 "온라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스토킹은 현행법상 처벌 대상에서 제외돼 피해자 상당수는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스토킹 피해 현실, 스토킹 범죄의 특성, 진화하는 스토킹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개정 논의가 국회에서 심도 있게 진행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0년 12월 서울 노원구 아파트 세 모녀 살해 사건은 스토킹처벌법이 통과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살해범 김태현이 2021년 4월 9일  도봉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면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12월 서울 노원구 아파트 세 모녀 살해 사건은 스토킹처벌법이 통과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살해범 김태현이 2021년 4월 9일  도봉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면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토킹 처벌법]

스토킹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2021년 3월 24일 국회를 통과해 그해 10월 21일부터 시행됐다. 스토킹처벌법은 1999년 처음 발의됐으나 20년이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스토킹은 경범죄 처벌법인 지속적 괴롭힘으로 분류돼 ‘10만 원 이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그쳤다.

시행된 스토킹처벌법은 가해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흉기 등을 이용했다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다.

이 법률에서 ‘스토킹행위’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해 다음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해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다.

가. 접근하거나 따라다니거나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

나. 주거, 직장, 학교, 그 밖에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장소 또는 그 부근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행위

다. 우편·전화·팩스 또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물건이나 글·말·부호·음향·그림·영상·화상을 도달하게 하는 행위

라.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해 물건 등을 도달하게 하거나 주거 등 또는 그 부근에 물건 등을 두는 행위

마. 주거 등 또는 그 부근에 놓여져 있는 물건 등을 훼손하는 행위

이에 대해 스토킹 행위·범죄의 정의 자체가 지나치게 좁다는 지적이 있다. 예컨대 ‘물리적 접근, 직접적 도달’에 해당하지 않는 ‘부재중 전화’ 이용 스토킹이나 온라인상 염탐 행위 등은 현행법상 스토킹 범죄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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