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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자기 삶을 잃어버린 여성에겐 19호실이 필요하다

도리스 레싱 단편, ‘19호실로 가다’ 

  • 기사입력 2022.10.05 11:09

여성 커뮤니티에서 자주 발견하는 댓글들이 있다. 아이만 없었다면 이혼했을 거라든가, 아이 때문에 산다든가 하는 내용인데 자신의 가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격렬하게 표현하는 댓글로 보였다. 그들이 실제로 이혼을 고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분노하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애원처럼 보인다. 

특히 자녀 때문에 이혼을 못 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를 상징한다. 예를 들자면 경제활동이 중단된 전업주부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아이들의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는 점, 가정을 유지하는 노력이 부부에게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았을 가능성 등을 보여준다. 앞의 예제들은 결혼 후 남편이 경제활동을 담당하고 아내가 육아와 가사를 담당할 때 쉽게 벌어지는 상징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은 숱한 절망을 만난다. 

도리스 레싱 저,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저,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에 등장하는 매슈와 수전도 마찬가지다. 매슈는 런던의 대형 신문사 차장급 기자였고 수전은 광고회사에서 일했다. 둘 다 벌이가 좋았고 각자 쾌적한 아파트를 소유했다. 둘은 결혼하고 네 명의 아이를 낳았고 정원이 딸린 리치먼드의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수전이 가정주부로 지내기로 했다. ‘엄마의 손이 필요하다’라고 판단해서였다. 수전은 아이들이 모두 엄마의 손을 떠난 뒤 자유로워질 시간을 보낼지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그 둘이 결혼하며 생각한 이상적인 결혼생활과 일치할 수 있겠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매슈가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다. 어느 날 매슈가 집에 늦게 돌아와 파티에 갔다가 어떤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마저도 정확히는 고백이나 용서를 구하는 발언이 아니었고, 괴롭힘을 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힐끔거린 정도였다. 

“수전은 왜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가? 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을 느끼는가? - 286p”

매슈의 바람을 계기로 강 풍경이 멋지게 보이는 부부침실은 거칠고 더러운 강이 내다보이는 침실로 둔갑한다. 수전의 인생은 점점 무료해지고, 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집 안의 자기만의 방은 이내 가족들의 웃음거리처럼 변질되고 그는 런던의 낡은 호텔의 19호실을 자기만의 방으로 삼는다. 그리고 자유와 더불어 자기파괴를 만나게 된다. 

“수전은 결혼하지 않은 스물여덟 살 때의 모습과 쉰 살 언저리에 다시 꽃피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뿌리로 삼아 꽃을 피울 것이다. 수전의 본질이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 288p”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울 때까지 직업을 포기하고 가정을 가꾸고 아이들의 교육에 힘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믿었던 배우자에게 신뢰를 잃는 비극이었다. 게다가 숨통이 트이는 호텔의 19호실에 가려면 매주 남편에게 5파운드를 받아야 하는 경제적 의존까지 남았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을 말할 때 흔히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린다. 자기만의 방을 가질 필요와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외침을 우리는 모두 잘 알면서도 실행이 어렵다. 그게 바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자의 죄책감이며 우리나라에서 엄마라는 입장의 여성들이 많이들 겪는 숙제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커뮤니티의 댓글에서 이혼을 갈망하는 여성들, 아이 때문에 이혼을 유예한다는 여성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이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방에서 반드시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 휴식하고, 고독을 체감하며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다면 충분하다. 잃어버린 독립성을 챙기고 나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고독을 맛보는 것이 그들이 이혼과 맞바꿀 진짜 가치 아닐까. 

엄마라는 이유로, 벌이의 수준이 조금 뒤처진다는 이유로 독립성의 포기를 강요받은 여성이라면 더더욱 필요할 그 가치를 지켜내야 할 것이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이 맞이한 결말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19호실로 가다’ (2018, 문예출판사)는 영국을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집이다. 초기 작품 11편이 실렸다. 대부분 작품들은 가부장제 등 전통적 사회질서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도리스 레싱(1919~2013)은 인종차별, 반전, 결혼 제도, 성 문제 등 현대의 사상·제도·관습·이념 속에 담긴 편견과 위선을 냉철하게 비판하며 사회성 짙은 작품을 써왔다.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88세로 역대 수상자 중 최고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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