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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잡러 서지은의 ‘도발’] 나는 두렵다

  • 기사입력 2022.09.28 16:52

꽤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어떤 남성으로부터 한동안 스토킹을 당한 경험이 있다. 당시 곤란에 빠져있던 내게 선의를 베풀려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남성을 인간적으로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나를 마음대로 자기 여자친구로 여기며 가스라이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도 해보고 강력하게 항의도 했다. 그때부터 하루에도 수십 통씩 이상한 문자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나를 몰래 찍은 사진이나 자신과 만났을 때의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남성의 연락을 그저 피하기만 하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그 남성과의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했다. 그러자 내 근무지에까지 전화를 걸어왔다. 곧 자기는 죽을 거라며 죽음의 책임은 내게 있다는 말을 했다.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경찰인 지인을 통해 상담을 받아보았지만 별다른 법적 대처방안이 없단다.

주변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몇몇은 내 처지를 동정했으나 어떤 이들은 대체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그런 남성을 만난 거냐고 나를 질타했다. 같은 일을 하던 그 남성의 선배가 내 지인이었던 덕분에 그 분의 도움으로 집요한 스토킹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땐 미처 몰랐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엄청난 행운이었음을.

신당역 화장실에서 스토킹에 시달리던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입사 동기 남성이었다.

내가 겪은 스토킹 피해와 신당역 살인 사건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의 강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어느 정치인은 좋아하는데 받아주지 않아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발언을 했고, 여성가족부 장관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때 나 역시 죽었을 수도 있었다, 고 생각하니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내 경험은 이미 오래 전 일임에도 나는 심각하게 동요했다.

우리는, 그녀와 나는, 더 조심해야만 했을까? 무엇을, 누구를 더 조심해야 하는 걸까? 여성이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는 문장은 얼마나 서늘하고 아픈 말인지, 신당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뭐가 중요한 건지, 모든 남성을 잠정적 범죄자 취급 말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릴 때 남자애가 치마를 들추면 어른들은 걔가 널 마음에 들어해 괴롭히는 거라는 이상한 말을 했다. 늦은 밤 집 앞까지 쫓아온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았을 때는 왜 밤늦게까지 야한 민소매 옷을 입고 돌아다녀 그런 일을 겪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스토커에게 왜 여지를 줬냐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들도. 네가 예뻐서,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 이런 말을 무심히 꺼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귀를 의심하게 된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냐고 묻고 싶어진다.

스토킹 범죄의 대부분이 남성에 의해 여성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비극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무꾼(남성)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여성)는 없어야만 하는데 나무(여성)가 거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나무꾼(남성)이 나무(여성)를 아예 없애버리는 건 이미 뿌리 깊은 여성혐오가 기저에 깔려 있는 거라고 본다.

내가 가지지 못 할 바에는 아무도 가질 수 없다는 논리, 남자들의 이런 행동은 너무 쉽게 뜨거운 사랑이 부추긴 로맨틱으로 포장되어 왔다. 그러니 쉽게들 말하는 것일 테지. 그의 로맨틱을 수용하지 못 한 여성 잘못이라고 말이다.

얼마 전 본 어느 영화에서 마지막에 살아남은 인물이 동성애자에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영화를 ‘페미 영화’라고 비난하는 글을 읽다 아득해진 기억이 있다. 왕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남자를 바라는 것뿐임에도, 왕자를 기다리는 듯 보이면 공주도 아닌 주제라며 비난 받고 남자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면 평강공주라 칭송한다.

혐오는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데, 단 한 번도 자처해 페미니스트라고 외쳐 본 일이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일컫는 일이, 여성혐오를 조장한다고 비난 받는 일이, 죽을지도 몰라서.

9월 22일 밤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신당역 여성노동자 살해 규탄 집회. (우먼타임스)
9월 22일 밤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신당역 여성노동자 살해 규탄 집회. (우먼타임스)

(서지은은) 걷고 말하고 듣고 읽고, 특히 쓰는 걸 좋아한다. 많은 페친을 둔 페이스북의 인플루언서다. 여러 직업을 가진 싱글워킹맘으로 최장수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의 꿈을 꾼다. 나이 마흔 다섯인 2020년, 첫 에세이집 '내가 이토록 평범하게 살 줄이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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