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성과 산업] ⑩ "오라이"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그때 그 소녀들, '버스안내양'

평균 나이는 18세, 대부분 시골서 상경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시달려
고속·관광버스 안내양은 여성들 선망의 직업
1961년 도입, 1990년 역사의 뒤안길로

  • 기사입력 2022.06.24 23:56

우먼타임스 = 강푸름 기자

“안 계시면 오라이!”

중장년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버스 안을 누비며 ‘버스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일했던 여성’ 버스안내양의 이 외침을 기억한다.

버스안내양은 대중교통이 보편화되면서 1961년 교통부가 버스 여차장제를 도입하며 생겨났다. 남성이 해오던 버스 차장 역할이 여성의 몫이 된 것이다.

이들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내릴 곳은 안내하고, 출입문을 열고 닫으며 서민들의 곁에 가장 가까이서 일했다.

버스안내양은 버스 안의 모든 것을 도맡아 처리하며 책임감있게 일했다. (인터넷커뮤니티)
버스안내양은 버스 안의 모든 것을 도맡아 처리하며 책임감있게 일했다. (인터넷커뮤니티)

◇ 평균나이 18세의 만원 버스 수호자, 버스안내양

통계청에 따르면 당시 버스안내양의 평균 나이는 18세였다. 대부분은 지방에서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여성들이었다.

지금은 버스 기사가 운전부터 승객 승·하차까지 확인하지만 안내양들이 있던 시절은 달랐다. 안내양이 승차 전 입구에서 승객들의 차비를 수금한 후 버스를 탁탁 치며 “오라이~”를 외치기 전까지는 문을 닫고 출발하지 않았다. 버스기사는 오롯이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안내양이 사라지면서 버스 기사들이 적응하지 못해 하소연하는 ‘웃픈’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안내양이 추락해 사망하거나 다치는 사고도 종종 발생했다.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에 손님들을 밀어 넣고, 정작 본인은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다니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이들의 근무복은 회사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개 세일러복 형태의 제복에 베레모, 빵모자 등을 썼다. 단발머리, 꽁지머리, 양갈래 머리 등으로 헤어스타일에는 힘을 줄 수 있었지만 장신구나 진한 화장은 금지였다. 몸을 쓰는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안 계시면 오라이!"를 외치던 '영자의 전성시대' 꽁트 모습.(유튜브 영상 캡쳐)
"안 계시면 오라이!"를 외치던 '영자의 전성시대' 꽁트 모습.(유튜브 영상 캡쳐)

◇ 강한 노동강도, 열악했던 환경에 시달렸던 고된 직업

버스안내양들의 근무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출퇴근길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는데, 그 틈을 타 돈을 내지 않고 우기는 승객이나 회수권 장수를 속이는 학생 등과 씨름해야 했다. 안내양들을 희롱하는 남자 승객도 적지 않았는데, 성희롱과 성추행 등을 당해도 호소할 곳은 없었다. 버스 요금을 현금으로 직접 받다 보니 정산할 때 금액이 안 맞으면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몸수색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노동시간도 매우 길었다. 안내양들은 첫차 출근 시간에 맞춰 새벽 5시쯤 근무를 시작해 하루 온 종일 버스에 매달려 있다 밤 10시가 돼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1983년에 실린 중앙일보 기사에는 18시간 이상의 강한 노동강도와 직업에 대한 사회의 부적절한 인식, 단순노동으로 기술 습득의 기회가 없는 점 등을 이유로 버스안내양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버스 회사 내 숙소와 식당, 휴식시설 등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았다. 1970년 정부가 서울 시내버스의 후생 및 운영 전반에 관한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운수 회사 종점의 각종 시설물 주위환경이 불결하고, 식당이 비위생적이며, 숙소가 청결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여차장들의 생활시설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서울시는 ‘버스 안내원 후생시설 개선대책’을 내놓는다. 숙소·휴게소·교양실·운동시설·위생시설 등 5가지 시설을 기준으로 버스회사 등급을 매겨 시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업체는 ‘면허취소 등 본보기로 강경 조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외에도 주당 근무시간 48시간 준수, 좌석버스 근무자의 경우 격일 근무, 시내버스 근무자는 이틀 일하면 하루 휴식 등을 명시했지만 여건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속버스 안내양의 모습.
고속버스 안내양의 모습.

◇ 지상 위의 스튜어디스 고속·관광버스 안내양

반면 고속·관광버스 안내양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비행기와 고속철이 없던 시절 가장 고급스러운 이동 수단은 고속버스였다.

관광버스나 고속버스의 안내양이 되기 위해서는 고졸 이상의 학력과 단정한 외모, 신장 160cm 이상 등 기준을 충족해야 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기준이다. 엄연한 외모차별이다.

아울러 언어 구사 능력이나 사교술, 장기간 여행에 필요한 인내심, 승객과의 커뮤니케이션 등의 자질도 필요했다. 이처럼 지·덕·체를 갖춰야 비로소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들은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여행을 위해 좌석 중앙의 통로를 오가며 안전띠를 착용했는지 묻거나, 음료수 등을 나눠줬다. 여러 가지 안내 사항을 전하기도 하고 차멀미를 하는 사람은 없는지 등도 세심하게 살폈다. 그야말로 '땅 위의 스튜어디스'였던 셈이다. 복장도 스커트 등 시내버스 안내양보다 갖춰진 제복을 입어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종 중 하나였다.

버스 안내양들은 종일 서서 일했다. (인터넷커뮤니티)
버스 안내양들은 종일 서서 일했다. (인터넷커뮤니티)

◇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직업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민자율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한다. 버스에는 내릴 때를 알리는 하차 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됐고, 벨과 자동문이 달린 버스 안에서 안내양이 설 자리는 점차 사라져갔다.

여차장제 도입 후 1만 2560명이던 안내양은 1971년 3만 3504명, 1970년대에는 5만여 명까지 늘어났지만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989년 12월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가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마지막 안내양은 1989년 김포교통 소속의 안내양 38명이었다. 고속·관광버스 안내양도 1992년 10월 우등고속이 도입되면서 사라졌다.

이로써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도시로 올라와 돈을 벌어야 했던 수많았던 18세 버스안내양들은 기억 속에만 남게 됐다. 그 시절의 버스안내양들은 이제 다 할머니 나이가 됐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만 안 본 뉴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