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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산업] ④전태일 이후, 70년대 노동운동 주도한 여성들(下)

  • 기사입력 2022.02.07 21:05
  • 최종수정 2022.02.08 10:31

노동 운동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전태일’ 열사. 그의 죽음은 노동자의 현실 문제를 사회의 전면에 부각시켰고, 노동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토대를 마련했다. 70년대 전태일 분신 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하며 민주노조 운동이 출발하는 전환점이 됐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의 강렬한 죽음 뒤 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한 건 여성들이었다. 당시 한국의 수출지향적 산업화는 여성 노동력에 의존했다. 70년대에 노동집약적 제조업 부문에 여성 노동자들의 고용이 증대하면서 다양한 사업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이 일어났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도 증가해, 1977년에는 19.5%에 달했다. 70년대 산업을 이끌어온 여성들의 상징적인 여성 노동운동 역사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1977년 09월 09일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사수투쟁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11월 27일 결성된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은 어머니 이소선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노동조합이다.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청계피복노동조합. (한국학중앙연구원/연합뉴스)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청계피복노동조합. (한국학중앙연구원/연합뉴스)

청계피복노조는 최초의 민주노조로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작업환경 개선 등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벌이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싸웠다.

1972년에는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피복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노동교실’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국은 아무리 탄압해도 꺾이지 않는 청계피복노조를 없애고자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고 노동교실 폐쇄를 시도한다. 

지원을 약속한 사업주가 노동교실의 주도권을 빼앗으려 했고, 노조는 7시간 동안 농성을 벌여 노동교실을 지켜냈다. 또 노동자들을 향해 노동조합을 믿고 지지할 수 있도록 홍보하고 장기표 등 대학생 및 노동운동가들과 연대한다. 

하지만 이소선은 구속된 장기표의 공판정에서 항의했다는 이유로 1977년 7월 19일 구속된다. 그리고 노동교실이 강제로 폐쇄된다. 

노동자들은 7월 29일 ‘평화시장사건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이소선 석방과 노동교실 폐쇄 중지, 노조 탄압 중지 등을 요구한다. 

9월 3일 검찰은 이소선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고, 건물주를 통해 노동교실 사무실 해약을 통고했다. 노동자들은 9월 8일 ‘결사선언’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어머니 즉각 석방, 폭력 경찰 처단, 노동 탄압 중지와 노동3권 반환 등을 요구하면서 격렬히 투쟁했다. 

9월 9일 노동자 200여 명은 노동교실 부근에 모여서 경찰의 제지를 뚫고 노동교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농성을 벌이는 과정에서 혈투를 벌였고, 경찰이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다 민종덕이 3층에서 뛰어내려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신승철은 유리칼로 두 번이나 배를 그어 할복을 기도했으며, 박해창도 유리 조각으로 팔의 동맥을 끊기도 했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과 임미경도 투신을 기도하는 등 노동자들은 교실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에 경찰로부터 이소선 석방과 이날의 사태에 대한 어떤 법적 제재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멈췄으나 그 즉시 53명 모두 연행돼 5명 구속, 9명은 구류 15일을 받게 된다.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강제진압하는 경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강제진압하는 경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979년 8월 9일 YH무역 사건 

1979년 8월 9일∼11일 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의 여성 생산직 노동자들이 회사폐업 조치에 항의해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였다. 

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YH무역의 경영주는 경영부실 상황에서 도 자금을 해외로 유출하고 노동자 감축, 위장 휴업, 하청화 등을 단행했다. 견디다 못한 여성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8년 5월 9일 제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회사는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등의 이유를 제시하며 1979년 3월 29일, 4월 말로 폐업한다고 통보했다. 

노동자들은 4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개최해 타 업체의 인수 및 고용 승계 등 대책을 협의키로 했다. 노조는 결의문을 통해 폐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극한투쟁도 불사한다고 경고했으나 회사나 관계 기관들은 회사 정상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7월 25일 긴급대의원대회를 다시 열어 7월 30일까지 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조합원 총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7월 30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야간 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청와대, 정부 당국 및 채권 은행, 미국 대사관 등에 탄원했지만, 회사는 자진 사표를 권유하는 등 정상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1979년 8월 6일 회사는 다시 일방적으로 폐업 공고를 했고, 7일에는 회사 기숙사 식당까지 폐쇄하고, 퇴직금·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받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고 공고했다. 

쫓겨날 위기에 처한 YH 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노동자들 일부를 기숙사에 잔류시키며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8월 9일 새벽 기습적으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 187명의 노동자가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여론화됐고, 8월 10일 YH무역 사장은 신민당사를 방문해 회사를 은행관리로 넘기고 폐업을 철회하겠다고 약속했다. YH 노조는 해당 조치가 취해지면 농성을 해제하겠다고 했으나 진전은 없었다. 

8월 11일 경찰 1000여 명이 신민당사로 진입해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노조 집행위원이었던 김경숙이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돼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이뿐만 아니라 신민당 의원과 당원, 취재하던 기자, 신민당사에서 일하던 용역, 경비들까지 경찰에 무차별 구타당했고, 심지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박권흠 대변인 등도 폭행당했다.

또 YH무역 기숙사에서 농성 중이던 58명의 여성 노동자들도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경찰에 연행된 노동자들은 8월 13일 회사로 옮겨져서 퇴직금과 7·8월 임금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당초 회사가 약속한 상여금, 월차수당, 8개월분의 해고수당을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경찰에 의해 강제 귀향하게 된다.

경찰은 8월 17일 이 사건과 관련해 주동자로 최순영 지부장 등 노조 간부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등을 구속했다. 

신민당은 노동 탄압과 경찰의 국회의원 폭행, 야당 파괴 공작 등을 비판하고 18일간 농성을 벌였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도 YH 노동자, 목사, 지식인 등의 구속에 항의했다. 그러자 정부는 8월 16일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산업체 등에 대한 외부 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을 설치해 기업체의 실태를 조사했다. 

이 사건 직후 야당 및 여러 민주화운동 세력이 공동전선을 형성, 반유신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성도섬유 브랜드인 톰보이등에 대한 불매운동 (출처 영등포산업선교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성도섬유 브랜드인 톰보이등에 대한 불매운동 (출처 영등포산업선교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5년 6월 성도섬유 ‘톰보이 불매 운동’ 

여성의류 톰보이를 만드는 성도섬유에서 여성 노동자를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노동절 행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에 감시와 미행을 당했고 해고까지 당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이들의 복직 운동을 지원하던 영등포산업선교회 유구영씨와 함께 여성평우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여성평우회는 10개 여성단체와 17개 여학생 대학연합과 함께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톰보이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던 톰보이 매장 앞에는 “입지도 사지도 말자”라는 피켓을 든 여성운동가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시위로 여성운동가 박영숙, 이미경, 안상님과 해고 노동자 박남희, 그리고 여대생 19명이 연행됐고, 이는 노동자와 여성운동가, 대학생의 연대를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 이 같은 활동이 바탕이 돼 1986년 3월 여성대회에서 ‘여성단체연합 생존권 대책위원회’가 결성된다.

1980년 여성단체연합들의 탄생

여성단체연합 생존권 대책위원회는 톰보이 이후에도 여성 노동자를 위한 농성을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1987년 2월 18일 생존권대책위, 성고문대책위를 모태로 21개 여성단체가 연합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발족한다. 

같은 해 3월 1970년대 민주노조에서 활동하던 여성 노동자 출신과 여성평우회 출신의 여성 지식인 활동가들이 여성 노동자 운동단체인 ‘한국여성노동자회’를 창립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여성평우회의 구 회원들인 여성지식인 활동가들과 주부들이 중심이 돼 ‘한국여성민우회’를 결성해 1980년대 이후 주부 중심 여성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외에도 ‘인천노동자회’(1987년 1월), ‘부천여성노동자회’(1989년), ‘부산 여성 노동자의 집’(1988) 등 전국 각 지역에 여성운동 단체들이 결성됐다. 또 ‘수원여성회’(1989년), 대전 ‘충남여민회’(1987년), ‘대구여성회’(1988년), 마산에 ‘경남여성회’(1987년), 부산 민주청년회의 여성분과를 중심으로 한 여성회(1989년), 광주 ‘광주전남여성회’(1988년), 전주 ‘전북 민주여성회’(1988년), 제주도 ‘제주여민회’(1987년) 등이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 여성 근로자를 위한 법령 제정 

이와 같은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1980년대 이후에는 여성 근로자의 권익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된다. 

1981년 12월 31일 여성의 직업훈련을 중시하는 규정을 신설한 ‘직업훈련법’, 1982년 4월 3일 노동부 장관의 여성 취업 기회 확대와 여성에 적합한 직종 개발을 위해 노력할 의무규정을 신설한 ‘직업안정법’, 1982년 8월 13일 여성 취업 기회 확대를 위한 근로기준법 시행령의 여성 사용금지 직종의 축소 등이 제정된다. 

또 1984년 8월 7일 여성도 선원이 될 수 있도록 ‘선원법’이 개정됐고, ‘공무원 임용령’(1984년 6월 29일, 1987년 4월 1일)과 ‘지방공무원 임용령’(1984년 12월 31일, 1986년 12월 31일)을 개정해 성차별적 정년 차이를 완화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1987년 여성계의 요구와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제정됐다. 법 제정 이후 곧 미비한 사항을 보완하고자 법개정운동이 전개되어 개정 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이 포함됐다.

이외에 여성계와 노동부 당국을 중심으로 평등 고용정책을 보장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모집, 채용 배치, 퇴직, 정년, 임금 등 고용의 전 단계에서 여성 차별을 해소하려는 정책이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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