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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영의 ‘나, 싱글맘’] 독립의 서막

  • 기사입력 2021.11.10 15:36

바야흐로 떨어지는 계절이다. 잎이 떨어지고, 기온이 떨어지고, 돈이 떨어지고, 돈이 떨어지고, 또 돈이...(돈은 사계절 내내 떨어지지 참. 어찌 돈이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바로 떨어지는지, 필경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등재할 희대의 미스터리다).

가을이 불러온 ‘떨어진다’가 6년 전 초여름 밤을 소환했다. 남자가 비처럼 내린다는 팝송도 있건만 내 품엔 퀴선생만이 떨어졌던 그 밤을.

7년 전 여름 소림의 탯줄이 떨어졌고, 그 가을, 평생 나를 자기 몸에 풀로 딱 붙이고 살 거라던 남편의 ‘새끼!’손가락이 나의 소지(小指)에서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 부녀는 만난 지 3개월 만에 떨어진 것이다. 3개월 인생이 전 생애였던 소림은 입장표명 불가로 아빠와 작별했고, 그 아비는 미련 없이 떠났다. 정이 싹트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이름 없는 빌라 202호는 서서히,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폭삭 늙었다. 수도꼭지에선 녹물이, 보일러에선 물이 똑똑 떨어졌다. 무기력해 무감했던 나는 그것들을 잠깐 응시했고, 그대로 살아갔다. 지인들은 나에게 그와 지냈던 공간에서 떨어져야 할 이유 백한 가지를 설파하며 이사를 종용했다. 이사도 그들의 채근도 성가셨던 나는 귀를 닫고 소림만을 열심히 보살폈다. 매일 저녁 창문을 내다보면 퇴근해 돌아오는 그가 보였다 사라졌다 고장난 가로등처럼 깜빡였다.

보다 못해 계시가 떨어졌다!

계시란 무엇인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함’, 즉, 연속된 신호를 보냈음에도 얼빠진 표정으로 일관하는 자에게 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그 안의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내려치는 것, 그게 바로 계시다(카프카에겐 책이 계시였나 보다). 대개 도끼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계시를 받기 직전, 거실 벽 쪽에 눕힌 소림 옆에 나도 누웠다. 이혼 후 안방 출입을 꺼리는 나는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잤다. 안방 침대는 점차 먼지 이불로 덮여갔다. 쌕쌕 소리가 난다. 돌이 지나면서 밤마다 버틸 때까지 버티는 소림이 잠들었다.

자유다! (아기 엄마들은 눈꺼풀에 성냥개비를 끼워서라도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핸드폰을 열었을 때였다. 뭔가 축축한 게 툭, 내 목과 가슴 사이로 떨어졌고 반사적으로 나는 그것을 집어 던졌다. 핸드폰을 열고 그게 떨어지고 그걸 집어 던지고. 3단계가 일사불란 진행됐다. 그 상황을 대비해 오래전부터 훈련해온 것처럼.

직후 어떤 예감에 소름이 돋았다. 거실 등을 켜자 예상대로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이불 끄트머리에 브로치처럼 붙어 있었고, 그것이 떨어졌던 내 가슴께에선 화약 냄새가 났다.

몇 시간 전 창문 밖 풍경이 스쳤다. 옆 빌라 주차장에 해충퇴치회사 차가 세워져 있던 장면이. 내 집으로 피신해 어둠 속 천장을 힘겹게 기어가던 바퀴벌레가 핸드폰 빛에 놀라 뚝 떨어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화약을 태운 것 같은 이 냄새는 바ㅋ... (그 이름을 발음 안 한 지 꽤 됐다. 나에게 그것은 해리포터의 볼드모트다. 봐서도, 입 밖에 내서도 안 되는 이름. 그래서 늘 ‘퀴선생’이라 쓰고 불러왔다), 아니 퀴선생이 뒤집어쓴 약 냄새였다. 나는 소림이 깰까 낮게 악악대면서 지옥문인 줄도 모르고 안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점등과 동시에 내 머릿속 퓨즈가 톡, 끊겼다. 눈앞에 한 마리 갈색 참새만한 퀴선생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인들이 최면 치료를 권할 정도로 나의 퀴선생 포비아는 심각하다. 하지만 바로 처단하지 않으면 퀴선생들은 숨을 것이고, 그럼 난 ‘눈에만 안 보일 뿐 한 장소에 존재함’이라는 더 강력한 미지의 공포를 겪어야하기에 에프킬라를 찾아와 칙 칙 발견 순서대로 보내버렸다.

가장 어려운 관문이 남았다. 그것을 하지 않고서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는 퀴선생 사체 치우기. 새 두루마리 휴지 3분의 1만치를 돌돌 말아 거실의 그것부터 치우려 했으나 손을 댈 수 없었다. 다가가다 갑자기 소름 돋아 물러나기를 십수 번. 흡사 택견 품밟기 고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민하다가 소림의 아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들으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작은 바늘은 11에 가 있었다. 소림이 잠든 시간이 아홉 시 반이었는데 한 시간이 넘도록 대치 중이라니. 오! 그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간단했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고, (여러 이유를 댔으나 어쨌든) 그는 거절하고. 그제야 진짜 이별을 했다. 고작 바퀴벌레 때문이라니, 언뜻 이해 불가지만 나를 잘 아는 그에겐 합당했을 부탁이다. 도끼가 꽝!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렸다. 홀가분했다. 더는 그 바다에서 내가 앉은 튜브를 그가 끌어주길 기대 않는다. 내가 마련해 온 튜브에 소림을 앉히고 두둥실 둥실 내 손으로 아이를 끌어주리라.

전화를 끊자마자 보인 퀴선생들은 그저 먼지였다. 머리가 차가워진 나는 먼지를 집어 변기 속으로 골인시켰다. 그리고 손잡이를 내렸다. 간단했다.

소림을 돌아보니 소림은 소림의 얼굴로 자고 있었다. 천사 같은 아기라는 표현은 내겐 와닿지 않는다. 소림 같은 소림, 소림 같은 아기, 소림 같은 천사라면 모를까.

퀴선생들과의 조우는 계시이자 충고였다. 신인지 누구인지 아무튼 저 위에 계신 분이 “아, 쫌!”이라고 허공에 빨간 글씨를 써 보여줄 수 없으니(그의 기준에선 정말이지 품격 없는 퍼포먼스이므로), 나에게 손수 퀴선생들을 보내시어 메타포 공격을 감행하신 게다.

나는 30년 된 이름 없는 빌라 202호를 떠났다. 퀴선생과의 조우는 무기력한 나의 추진 에너지로 적합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그 에너지라면 바로 화성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거기서 감자를 재배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이사하는 데 그 에너지를 쓰기로 했다. 바로 추진했다. 퀴선생들의 방문 다음 날부터 엄마와 함께 부동산이란 부동산은 다 돌아다녀 지금의 작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돼 깨끗한 (원룸 같은) 투룸으로 이사 왔다.

이 작디 작은 집의 명의자도 세대주도 나다. 전입신고를 마치고 뗀 등본엔 홍소영과 소림만이 들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나와 관련된 모든 서류에서 사라졌다. 고장난 가로등처럼 깜빡깜빡하다가 어느 순간 팟, 암전.

소림이가 네 살 때의 어느 저녁이었다. 쿵! 소리에 부엌으로 달려가니 소림이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부엌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고 놀던 소림이가 싱크대 하부장 아래 걸레받이를 뻥 차버린 것이다. 걸레받이가 쓰러져 하부장 밑이 뻥 뚫렸다. 뻥 뚫린 그곳은 빛을 모르는 칠흑의 세계, 음습한 곳, 손 뻗기 싫은 곳.

그때, 소림이가 빛이 들어와 애매해진 어둠을 가리켰다. 작은 퀴선생 둘이 죽어 있었다. 깊은 어둠엔 몇이 더 있을지 미지수다. 나는 어떤 생각이랄지 고민 없이 그대로 걸레받이를 끼우고선 투명 박스테이프를 가져와 하부장과 걸레받이 경계를 붙이고 또 붙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남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바퀴벌레는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독립선언의 '계시'가 되기도 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남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바퀴벌레는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독립선언의 '계시'가 되기도 했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를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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