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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단체 HRW, “한국은 디지털 성범죄 선두국가”

휴먼라이츠워치, 한국 디지털 성범죄 조사 보고서 발표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는 세계의 경고 사례
“한국 남성 ,수사기관, 법조계는 성 폭력에 관대하다”

  • 기사입력 2021.06.16 17:39
  • 최종수정 2021.06.16 17:49

우먼타임스 = 성기평 기자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16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단체는 2019년 11월부터 2020년 1월까지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피해자) 12명과 범죄 피해 후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의 유족을 인터뷰했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 디지털 성범죄 관련 정부 정책에 관여한 전직 관료, 경찰 수사관, 정부기관 전문가, 민간 단체 등과도 20여 차례 인터뷰했다.

보고서 제목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My life is not your porn)’는 2018년 여성들만 참여해 수차례 벌인 혜화역의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에서 나온 말이다.

이번 보고서는 국제기구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를 심층 조사해 정부에 권고안을 낸 첫 번째 사례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휴먼라이츠워치 홈페이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휴먼라이츠워치 홈페이지. 

이 보고서는 한국에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기술적 발전에 비해 성평등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와 사법부의 인식은 안일하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는 정부와 기업이 인권 중심적인 보호장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술적 혁신이 어떻게 젠더 폭력을 조장하는지를 보여준다.”

보고서에는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들이 다양한 피해 상황 증언이 담겼다.

“밖에서 화장실 가기가 겁이 난다. 꼭 가야 할 때는 변기, 벽 사이, 화장실 문, 경첩 등에 몰카가 설치되어 있는지 한참 확인한다. 며칠 전에 동대구 기차역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거의 모든 칸에 다른 여성들이 막아놓은 구멍이 적어도 한 개 이상 있었다. 내 불안감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끔찍하다.”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서 탁상형 시계를 선물 받아 침실에 놓았는데 그 시계는 몰카였고 실시간으로 상사는 나의 침실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상사는 1심에서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방이 무섭다.”

“한 대학생은 강의를 듣거나 밥을 먹는 여자 동기들을 몰래 촬영한 뒤 폴더별로 분류해 저장해놓았다가 친구들에게 발각되었다.”

“어떤 병원에서는 임상병리사가 병원 탈의실에서 여성 동료들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한 피해자는 남자친구의 휴대전화 속에서 자신을 포함해 이전에 사귀었던 연인들을 몰래 찍은 사진을 발견해 신고했고, 다른 피해자는 생면부지의 남성이 집 인근 건물 지붕 위에서 자신을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해자가 경찰에 붙잡힌 뒤에야 알게 됐다.”

2018년 5월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성 편파수사 규탄시위'. 여성들만 수만 명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2018년 5월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성 편파수사 규탄시위'. 여성들만 수만 명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보고서는 헤더 바 휴먼라이츠워치 여성권리국 임시 공동디렉터가 발표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디지털 성범죄는 전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문제다. 한국의 사례를 주목한 것은 불행히도 한국이 해당 분야의 선두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디지털 성범죄가 비교적 일찍 대두됐다.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설치된 불법 카메라는 다른 국가에는 흔치 않다. 또 이렇게 촬영된 이미지들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한국의 사례에 집중한 이유다. 다른 국가들이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어떻게 진화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일부 남성들이 피해자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불법 촬영물의 유포와 소비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으로 간주한다는 말을 인터뷰 참가자들에게서 많이 들었다. 디지털 성범죄가 유발하는 피해의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사에 참여한 한 기자는 ‘남자들은 그것이 여자들에게 그렇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누가 자살했다는 말을 들으면 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런 걸로 왜 죽어?'라고 말한다’고 증언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이것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자신이 직접 증거를 수집하고 자신의 촬영물이 인터넷에 새로 올라오는지를 감시한다. 그 폭력 상황에 계속 노출되면서 트라우마가 악화된다. 이러한 피해가 피해자 개인에게 끝나지 않고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지며 이로 인해 피해자가 대인관계와 교육, 고용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무단 유포된 촬영물에 대해 피해자가 촬영에 동의했거나 성행위에 동조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이유로 그리 된다.”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면서 범죄의 대상이 된 적 없는 여성들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전 애인이 성적 촬영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화장실 등 공공장소에서 몰카에 찍히지 않는지 큰 불안감을 느낀다.”

“법적 대응을 하는 피해자들은 그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이 남성인 경찰이 이 범죄의 심각성과 영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피해자는 ‘신체 접촉이 없다는 이유로 카메라로 자행한 범죄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법관계자들 자체가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신뢰를 크게 훼손한다. 남성 검사, 남성 판사, 남성 경찰, 남성 교사가 디지털 성범죄로 붙잡혔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낮은 기소율과 가벼운 처벌을 지적했다. 살인, 강도 등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서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후 양형기준이 만들어졌지만 ‘판사의 재량을 막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사법부의 이러한 태도는 유죄가 확정되더라도 대부분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지나치게 낮아 생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피해자들이 경찰 등 사법 관계자들을 상대하면서 2차 피해를 경험한다. 2차 피해에는 피해자를 탓하는 말이나 성희롱도 있지만 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점, 수사관이 증거로 수집된 촬영물을 소홀히 대하는 태도 등도 있다. 피해자가 증거물로 제출한 촬영물이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서 보여지는 것에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더 상처받는 피해자들의 증언도 있다. 법원이 피해자의 고통보다 피고인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증언도 담겼다.

“가해자가 500만 원도 안 되는 벌금형을 받을 건데 그래도 공소제기를 하실 건가요?” (한 검사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게 한 말)

“판사가 남자였는데, 최종 판결문에서 ‘(가해자가) 직업이 있고 최근에 결혼했고,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했어요.” (불법촬영 피해자)

“경찰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수 있다거나, 형량이 낮다거나, 외국 플랫폼이 관여된 경우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사건 접수를 아예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무단으로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사진을 촬영한 전 남자친구를 고발한 한 피해자는 “남자친구가 나이가 어리고, 기소된 것이 처음이었고, 미래가 유망하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증언했다. 한 불법촬영 피해자는 판사로부터 “합의를 하지 그러냐? 재판이 계속 진행되면 너한테 좋을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보고서는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검찰로 송치한 뒤에도 기소되지 않는 비율이 다른 사건보다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불법촬영물 제작·유포에 대한 불기소 처분율은 43.5%로 살인 사건(27.7%)이나 강도 사건(19%)의 불기소 처분율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2017년 디지털 성범죄로 체포된 가해자 중 2.2%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에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다고 분석했다. 동의 없이 불법촬영하거나,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한 영상물·사진을 타인과 공유하거나, 사진·촬영물을 조작 또는 합성해 피해자들을 협박하는 유형 등이다.

보고서는 피해자들이 정신적 트라우마를 비롯해 △사회적 낙인과 명예훼손 △고용상의 피해 △이주 △삶의 방향 변화 등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익명의 경찰 수사관은 “성관계 불법 촬영을 당한 한 피해자는 사건 후 대학을 자퇴하고 미국 유학을 갔다. 이후 다시 돌아왔으나 사람들이 알아봐 성형수술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밖을 전혀 못 나갔다”고 증언했다.

보고서는 불법촬영물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증언도 담았다. 인터뷰에 응한 한 불법카메라 탐지 업체 대표는 불법촬영물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가해자들이 있다며 이들이 플랫폼 등과 공생 관계를 이룬다고 증언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한국 정부에 대해 이렇게 권고했다.

“경찰 및 법조계, 정치적 대표성, 공적 생활, 민간부문에서 특히 고위직에서의 여성 참여를 높이고, 성별 임금격차를 철폐하고, 돌봄 노동에서 평등한 참여를 증진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을 최소화하고, 성차별적 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조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성불평등 수준을 낮춰야 한다.”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에 △디지털 성범죄 양형·구제의 적절성을 조사하는 위원회 설립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 지원 서비스에 충분한 기금 제공 △경찰·법조계 등에 여성 참여 제고 등을 권고했다. 또 피해자가 형사소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가해자나 인터넷 사업자가 직접 특정 불법촬영물을 삭제하는 걸 강제할 수 있도록 민사상 구제절차를 강화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보고서는 2018년 4월 출범해 불법촬영물 삭제를 지원하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의 역할에는 주목했다. 보고서는 이 기구가 혁신적 서비스로 유사한 문제로 씨름하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모범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삭제하는 것은 전문적인 분야이고 생존자들에게는 최우선 순위에 있는 문제다. 다른 국가들도 벤치마킹할만한 굉장히 중요한 모델인데 센터 인력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정부에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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