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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 작가 칼럼] 여성이 거부하는 페미니즘의 민낯

  • 기사입력 2021.02.26 18:13

내가 이룬 가정에서는 성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해도 부모세대와 그 형제들, 또 이어지는 자손들까지 모두 평등하게 지내긴 매우 어렵다. 우리 모두 평등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지해도 가슴 깊이 성 평등을 당연시하는 건 난이도가 높은 문제라서 그렇다. 이 같은 실상을 보여주는 곳이 명절 무렵의 여성 커뮤니티라고 생각한다. 

몇 주 전, 설 연휴가 지나갔다. 연휴 중에, 그리고 연휴가 끝난 뒤에 여성들이 즐겨 이용하는 맘카페, 인테리어 카페 등에 접속해보면 누가 집안일을 얼마나 하고, 어떤 부당한 대우를 주었으니 받았느니 하며 설전이 벌어진다. 언젠가 이런 설전이 까마득한 멋 옛날의 헤프닝이 되길 바라건만, 아직은 살갗에 와닿는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명절에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더러워진 식기를 씻고, 장을 보고, 청소하는 등의 일은 ‘일’로 존중받기엔 여전히 하찮게 인식되고, 그 하찮은 업무가 여성에게 편중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슬픈 것은 이 같은 현실을 문제시하고 그동안 평등하지 못했던 가정문화를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리’라는 이름으로 돌을 던지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아서이다. 

복잡다단한 설전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한다. 한쪽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잘못된 구습을 문제 삼고 앞으로 평등한 가정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다. 다른 한쪽은 도리와 예의, 그동안 유지된 가정문화에 순응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전자는 여성에게 치우친 가사와 곧 죽어도 아들에겐 주방일을 못 시키지만, 며느리에겐 당연하다시피 시키는 어른들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후자는 전업주부가 많은 한국 사회에서 어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주방일을 맡아 하는 게 나쁠 게 없다는 입장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이들의 의견을 좀 더 열심히 읽는 편이다. 나와는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의견, 여권이 부실한 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이를 벗어나는 대신 순응하는 길을 택한 여성들의 마음을 이해해보고 싶어서다.

그리고 후자 여성들의 목소리에는 ‘며느리 도리’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몸이 고단하지만 아직은 주방에서 여성이 일해야 한다고, 어른들이 이것저것 시키시는 게 힘들지만 그럼에도 가족 간에 불화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며 조선 시대부터 흘러온 가부장 문화가 해체되는 데 반감을 드러낸다. 여성이 겪는 차별을 깨는 데 같은 여성이 그만두라며 나무라는 격이다. 

웹 드라마 며느라기의 한 장면. 명절 음식 준비를 남편, 자식들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 그러나 며느리는 당연히 함께 명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웹 드라마 며느라기의 한 장면. 명절 음식 준비를 남편, 자식들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 그러나 며느리는 당연히 함께 명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소 우리나라에서의 페미니즘은 여러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벽, 여성이 거부하는 페미니즘이다. 후자의 여성들은 차별받고 살아온 과거를 인정하기 어려워 성 평등을 거부하고 구습을 이어가자며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 혹은 ‘순탄하게’ 살고 싶다는 말로 감춰둔 속내는 자신을 포함한 젠더 문화의 변화가 두려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를 주도하는 여성들을 나무라고 도리와 가족 운운하며 페미니즘의 성장을 억누른다. 

다들 입을 모아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성우월주의의 한국 사회가 남녀평등의 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변하고 있는 과도기라서 혼란스럽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과도기를 건너는 와중에도 명절이면 변함없이 여성들이 기름 냄새 풍기는 주방에 들어앉아야 하고, 남성들은 텔레비전 앞에 늘어앉아 휴식하고 있다면 기껏 걸어온 과도기를 역행할 뿐이다. 변화에 동참하겠다며 주방에 들어선 아들에게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다고!”를 외치며 자기 아들을 무능한 자로 몰아가는 여성은 다른 여성들이 성 평등을 향해 힘들게 쌓아온 노고를 발로 차버리고 있음을 깨우쳐야 한다. 

여성은 처음부터 며느리로 태어나지 않는다. 오롯이 한 명의 여성이자 개별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기에 가부장제에 동승해 평등을 유린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성들이 존재하는 가정에서는 소중한 성 평등이 유린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평등을 초래하는 구습은 흘러가는 세월에 묻어두는 게 아름답지 않을까? 변화의 물결에 동참은 못하더라도 발목은 잡지 않는 것, 타인과 연대하며 사는 방법엔 그런 수수하고 우아한 방식도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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