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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치열했던 오스카 시상식(下)

  • 기사입력 2020.02.21 17:49
  • 최종수정 2020.02.24 16:07

[우먼타임스 박종호 기자] 오스카 수상결과를 놓고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것은 치열했던 경쟁 끝에 뒤따르는 숙명과도 같다. 그 점에서 올해 오스카 시상식의 결과는 오히려 다소 싱거운 편이었다. <기생충>이 가장 중요한 작품상과 감독상, 그리고 각본상까지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할리우드의 많은 관계자들은 아직까지 1977년 열린 49회 오스카 시상식을 역사상 최고로 치열했던 시상식으로 기억한다. 영화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작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한 해였을 뿐더러, <작품상>과 <감독상>의 수상에서까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다시 말하자면 치열했던 경쟁의 과정과 그 뒷이야기가 어우러지며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시상식으로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치열했던 오스카 시상식(上) 에서 이어집니다.
 

시상식에서 스탤론과 알리의 에피소드. (핀터레스트)
시상식에서 스탤론과 알리의 에피소드. (핀터레스트)

◆ 이변은 감독상에서부터

여우조연상을 수상할 때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연출되기도 했다. <록키>로 전 국민적인 스타로 급부상한 실베스터 스탤론이 시상을 맡았다. <록키>가 실제 무명복서와 무함마드 알리의 15라운드 대결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에 스탤론의 뒤에서 ‘진짜’ 알리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알리는 곧 “네가 내 스크립트를 도둑질한 놈이로구나!”라며 스탤론과 한바탕 스파링 대결을 벌였다. 아직까지도 종종 언급되는 유쾌한 에피소드다.

실제로도 알리는 자존심 강하고 거침 없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에 <록키>의 각본을 쓴 스탤론과 감독 존 아빌드센은 혹시나 영화의 내용이 알리의 기분을 그르치게 하지는 않았을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난 뒤 알리는 <록키>를 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후에는 영화에 헌정하는 시까지 지어 바쳤다.

이들의 유쾌한 대결이 끝나고 나자 장내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에 응답하듯이 감독상은 시드니 루멧이나 마틴 스콜세지, 할 애슈비도 아닌 존 아빌드센에게로 돌아갔다.

곧바로 <록키>의 작품성과는 관계없이 다소 의외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는 존 아빌드센이 오스카와 별로 궁합이 맞는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오스카는 전통적으로 ‘흥행성과 예술성이 적당히 어우러진 대작’을 선호한 데 비해, 아빌드센은 이러한 영화에 부담감을 느껴서인지 평생에 걸쳐 저예산 소규모 영화만을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제작사에 제작비를 줄여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 성향을 짐작할 만했다.

감독상을 수상한 존 아빌드센. (핀터레스트)
감독상을 수상한 존 아빌드센. (핀터레스트)

워낙 오스카야 서로의 수상에 대해 축하하는 분위기이지만, 분명 속이 쓰린 이도 있었을 것이다. 루멧 감독이 대표적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루멧 감독은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 이 같은 결과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앞선 골든 글로브에서는 감독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본인도 기대감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그는 몇 십 년이 지난 뒤에도 당시를 회상하며 “아니 그 때는 솔직히 내가 감독상 받을 만하지 않았냐?”라며 아쉬움을 토해내곤 했다. 

루멧 감독뿐만 아니라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역시 오스카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8번이나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택시 드라이버>와 함께 <성난 황소(레이징 불)> 때가 특히 아쉬웠다. 그가 마침내 감독상을 수상한 것은 2007년으로(<무간도>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 당시 업계에서는 ‘이번에야말로 스콜세지 감독을 한번 챙겨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반면 루멧 감독은 끝내 감독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2005년 공로상을 수상함으로서 평생에 걸친 아쉬움을 달랬다.

◆ 모든 영광은 록키의 차지로

남은 것은 오스카 중에서도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이었다. 시상을 맡은 잭 니콜슨이 단상 위로 올라와 조용히 후보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직이 언급했다. 화면을 통해 쟁쟁한 제작자들의 얼굴이 일일이 스쳐 지나갔다. 니콜슨은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수상작의 이름을 외쳤다. 바로 <록키>였다! <록키>가 감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독식하며 가장 큰 영광을 독차지했다.

작품상을 차지한  '록키'..(핀터레스트)
작품상을 차지한  '록키'..(핀터레스트)

장내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 역시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록키의 애인 에이드리안 역을 맡은 탈리아 샤이어는 아예 의자에서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 <기생충>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오늘날의 영화는 워낙 다양한 주체가 협업하는 ‘산업’에 가깝고, 그렇기에 작품상은 흔히 제작자들을 위한 상이라고도 불린다. 이에 <록키>의 제작을 맡은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도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깥쪽으로 걸어 나왔다. 

바깥쪽에 앉은 스탤론이 윙클러와 차도프의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섰다. 이에 작은 몸집의 윙클러가 우람한 스탤론을 시상대 쪽으로 잡아끌었다. 스탤론이 마지못해 윙클러에게 끌려가며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은 모두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영화 제작에 있어서 스탤론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제작자 두 명과 주연배우가 작품상 시상대에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제작자들의 소감이 이어졌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스탤론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보탰다. “세상의 모든 록키들에게, 사랑합니다.”

<록키>의 주연배우이자 각본을 쓴 스탤론은 당시까지만 해도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배우의 꿈이 컸던 스탤론은 생계를 위해 포르노 배우로까지 활동했는데, <록키>의 성공 이후 자신이 출연한 비디오를 회수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스탤론은 언젠가 무함마드 알리와 무명이었던 척 웨프너 선수의 경기를 보고 이에 큰 영감을 얻었다. 단 3일 만에 각본을 완성한 그는 여러 영화사를 전전했는데, 사실 이전에도 여러 영화사들의 관심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스탤론은 자신에게 감독과 주연배우 자리를 주지 않으면 각본을 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많은 영화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거대 영화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도 <록키>의 각본에 관심을 보였다고는 하나, 이들은 로버트 레드포드나 알 파치노 같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원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스탤론은 무모해보였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할 제작사는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당시의 작품상은 록키의 제작사와 스탤론 모두에게 어울리는 상이라고 할 만하다. 중소 제작자였던 어윈 윙클러와 로버트 차도프는 이에 감독은 따로 기용한다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의 저렴한 제작비를 투자해 <록키>의 영화화를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감독인 존 아빌드센의 전성기까지 열어줬다는 점에서 이는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아무리 70년대라고는 하나, 100만 달러는 현재 우리 돈으로 약 12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결코 많은 돈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최초의 <스타워즈>의 경우에도 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진행했는데, 개봉 이전까지만 해도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SF영화를 만들겠다니, 미친 것 아니냐”는 비웃음이 끊이질 않았었다. 하물며 록키의 제작비는 당시 <스타워즈>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실제로 촬영 중에도 워낙 돈이 궁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일례로 극 중에서 록키의 처남인 폴리가 칠면조 요리를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NG를 우려한 스탭들이 늘 창문 밖에서 칠면조를 받아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록키의 유명한 훈련 장면. (네이버 영화)
록키의 유명한 훈련 장면. (네이버 영화)

◆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록키 시리즈

스탤론과 아빌드센을 전국민적인 스타로 만들었던 1977년의 오스카 시상식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시리즈의 영광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록키 시리즈는 이후로도 흥행을 거듭했다. 특히 <록키2>의 경우 전편을 뛰어넘는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작품성 면에서도 1편의 감동을 잇는 훌륭한 속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스탤론이 직접 연출한 작품이기도 했는데 이 때부터 제작자이자 연출자로서 스탤론의 평판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약 3년간의 주기를 두고 개봉한 <록키3>과 <록키4>는 비록 흥행에서는 성공했을지라도, 록키 시리즈가 흔하디 흔한 마초물, 혹은 반공물로 비판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절치부심한 스탤론은 1990년 1편의 아빌드센을 다시금 영입해 야심차게 <록키5>을 선보였지만, 이미 전국민적인 영웅이 된 록키를 다시금 길바닥으로 주저앉히는 모든 과정과 영화적 장치가 무리수로 작용하며 흥행 및 비평 면에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마지막 속편인 <록키 발보아>가 개봉하기까지 약 16년이 걸렸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2006년 개봉한 <록키 발보아>가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훌륭하게 시리즈가 마무리되자 분위기가 다시금 바뀌었다. <록키1>의 향수를 끄집어내는 연출에, 70이 되어가는 노인이 된 스탤론이 느끼는 허무함이 관객들의 심정을 잘 자극했다는 평가다.

새로운 팬들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는 2015년 개봉한 스핀오프 시리즈, <크리드>로 명맥이 이어졌다. 록키가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아폴로 크리드의 사생아인 아도니스 크리드를 복서로 키우는 과정을 담았는데 이 역시 평가가 무척 좋다. 당장 이전까지 연기 못하는 배우로 유명했던 스탤론은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다. 

작년 초에는 <크리드2>가 개봉했는데, 이 작품 역시 나쁘지 않은 후속편이라는 평가다. 오히려 악역으로 등장한 드라고 부자가 무척 입체적으로 묘사되었다는 호평이 인상적이다. 이에 현재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후속편의 제작이 논의되고 있다. 스탤론 역시 최근 후속편을 묻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니 <록키> 시리즈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시작에는 1977년의 가장 치열했던 오스카 시상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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