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Roxane Gay)
2014년 미국, 2016년 국내 출간(사이행성)
원제 ‘Bad Feminist:Essays’

2018년 한 해 동안 포털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낱말은 ‘페미니스트’였다. 2017년에는 2위였다. 2015년 무렵부터 지구촌에 불기 시작한 페미니즘은 여전히 시들지 않는 시대적 명제다.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니즘 영화나 공연을 보고, 페미 굿즈(goods)를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년 전부터 페미니즘은 국내 출판계의 황금알이 됐다. 5, 6년 전만 해도 한 해 평균 20여 종도 출간되지 않은 이 방면 도서는 한 해에 100종 가깝게 나오고 있다. 그 세가 조금은 줄었다 하나 국내외 출판 시장에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2016년 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2010년대 첫 밀리언셀러가 됐고 영화화됐다. 

물론 ‘시장 페미니즘(market feminism)’이라는 지적도 있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는 제쳐놓고 이미지만 팔거나 소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트렌드와 용어가 등장하고, 성별 갈등과 혐오로까지 가지를 뻗은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기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고전과 현대의 빼어난 저술을 찾아 읽는 일이 더 필요해졌는지도 모른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이후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계의 주목을 받은 기념비적 도서들이 많이 나왔다. 페미니즘은 무엇이고 페미니스트는 누구인가. 우먼타임스는 그 답을 찾아 페미니즘 명저 순례를 떠난다. (편집자 주)

책 ‘나쁜 페미니스트’와 작가 록산 게이. (교보문고, 인스타그램)

[우먼타임스 하기석 편집위원] 2014년 미국에서 발간한 이 책의 원제는 ‘Bad Feminist:Essays’다. 2016년 3월 한국에서 번역 출간한 출판사는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에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 부제가 바로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다. 그리고 왠지 불온한 냄새가 풍기는 책 제목에 대한 암시를 준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려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문장 몇 개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만으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다.  

“그 시절 누가 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최초로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왜 그렇지? 나 페미니스트 아니야. 나 남자한테 오럴 섹스 해줄 수 있단 말이야…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끔 손사래를 치며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인신공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라고.”

“십대 후반과 이십대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면 매사에 일관적이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할까봐 거부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서문)

록산 게이가 2017년 한 행사에서 자신의 책을 읽어주고 있다. (유튜브)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예뻐서 한번 안아본 건데 어때? 그냥 가슴 한번 만진 건데 어때? 웃고 넘어가요. 당신은 아름다우니까요. 남자가 외모로 칭찬 좀 할 수도 있지 뭘 그래요?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럴까? 이것은 훨씬 심각하고 근본적인 사회적 질병의 증상들이다. 이 문화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변덕과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여성의 가치는 계속해서 폄하되거나 무시되어 버린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여성 혐오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가장 끝에는 대중문화에서의 여성 혐오가 자리잡고 있고 중간에는 여성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행태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이 나라의 입법자들이 있다. 입법자들은 이 모든 여성 혐오가 활개 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용히 만들어주고 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다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전부 다 털어놓고 싶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마지막 문장)

록산 게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은 바로 이거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이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것이 아무리 불편하고 두렵고 공격을 받더라도, 그래도 내 선택은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이다. 설사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감당하고서라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이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아마존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국내에서도 소개되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타임지가 “2014년은 록산 게이의 해”라고 말했을 정도다. 1974년생으로 젊은 학자 축인 록산 게이는 이 책으로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록산 게이는 미국 출판계나 언론계에서 가장 환영받는 게스트다. 2018년 한 유명한 독자와의 행사에서 대담하는 록산 게이. (유튜브)

저자가 책 제목에 ‘에세이’라고 붙였듯이 이 책은 학술서와 비평 사이, 비평과 에세이 사이를 경계 없이 넘나들며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차별에 대해 말한다. 글쓰기 자체로도 명성을 얻었다. 마치 록산 언니가 옆에서 속삭이듯 술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분노와 감동과 눈물과 공감과 해방감을 준다. 여성 차별과 학대에 대한 언짢고 무거운 현상을 짚으면서도, 저자는 놀랍게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재미있다. 표지도 핑크로 단순하게 제본된 이 책은 스타박스에서 달달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펼치기에 좋다. 그가 중학생이었을 때 남자친구를 포함한 여러 명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경험도 썼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걸고 써나갔기에 삶과 글이 분리되지 않은 ‘사적인 글쓰기의 힘’을 보여준 저작이다.

글 잘 쓰기로 유명한 여성학자 정희진은 “나도 이렇게 정직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녀가 부럽다. 나는 이 책이 여성주의적 글쓰기의 전범이 되면 좋겠다”고 추천했다. 

이 책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자신의 경험에 빗대 짚어가면서, 미국의 정치 사회 대중문화가 얼마나 남성본위적이고 여성을 차별하는지, 최종적으로 왜 (나쁜) 페미니스트가 선택이어야 하는지를  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 이론에 정통하지도 않고,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접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높고 위대한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완벽한 인간 같은 포즈를 취해야 한다. 그러다 한두 번 대차게 말아먹히면 사람들이 달려들어 가차없이 끌어내린다”고말한다. 

그가 말한 ‘나쁜(bad)’란 의미는 도덕적으로 나쁜 게 아니라 ‘부족하고 못 미치고 불완전해서 완벽하게 훌륭하지는 않은’이란 의미로 읽힌다.

록산 게이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해도 소신이 있다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때 수십 번, 수백 번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살펴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의미다”(문장들 발췌) 

책 출간 다음해인 2015년 TED에서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는 록산 게이. (유튜브)

그녀는 책 출간 후 2015년 6월 TED에 초대받아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이란 유명한 강연을 한다(유튜브에 검색하면 한글번역 동영상이 있다). 그 첫 마디도 “나는 여자로서도, 페미니스트로서도 실패했습니다”였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에 대해 학술적으로 고정된 정의, 페미니스트에 대해 지나치게 높게 요구하는 잣대나 기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높은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닿지 못한다는 이유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로 하여금 “나는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을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성 각자의 욕망과 취향, 한계 등을 인정하면서, 다소 불완전하지만 좀 더 자유로운, 다양한 형태의 페미니즘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하고 복잡한 개인적 경험이나 개개인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즘의 길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편견에 반박하는 동시에 이전의 공격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페미니즘에서 나타난 오류들도 인정한다. 그래서 ‘대중적 페미니즘’이라는 평을 받았다. 

퍼듀대 교수인 록산 게이(Roxane Gay)는 아이티계 미국인이다. 그는 비교적 풍족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이민자 가정의 매우 뚱뚱한 몸을 가진 흑인 여성이라는 점은 그가 싸워나가야 할 ‘차별’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옳고 그른 방법은 없다. 핑크색을 좋아하고 드레스를 사랑하고 제모를 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의식과 관심의 차이다. 여성이 겪고 있는 불편한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책의 말미에서는 록산 게이는 이렇게 한탄하고 다짐한다. “아, 불쌍한 페미니즘이여. 페미니즘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운동의 일차적 목표는 모든 분야에서의 성평등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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