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2016년

2018년 한 해 동안 포털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낱말은 ‘페미니스트’였다. 2017년에는 2위였다. 2015년 무렵부터 지구촌에 불기 시작한 페미니즘은 여전히 시들지 않는 시대적 명제다.   

페미니즘 책을 읽고, 페미니즘 영화나 공연을 보고, 페미 굿즈(goods)를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년 전부터 페미니즘은 국내 출판계의 황금알이 됐다. 5, 6년 전만 해도 한 해 평균 20여 종도 출간되지 않은 이 방면 도서는 한 해에 100종 가깝게 나오고 있다. 그 세가 조금은 줄었다 하나 국내외 출판 시장에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2016년 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2010년대 첫 밀리언셀러가 됐고 영화화됐다. 

물론 ‘시장 페미니즘(market feminism)’이라는 지적도 있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는 제쳐놓고 이미지만 팔거나 소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트렌드와 용어가 등장하고, 성별 갈등과 혐오로까지 가지를 뻗은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기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고전과 현대의 빼어난 저술을 찾아 읽는 일이 더 필요해졌는지도 모른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이후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계의 주목을 받은 기념비적 도서들이 많이 나왔다. 페미니즘은 무엇이고 페미니스트는 누구인가. 우먼타임스는 그 답을 찾아 페미니즘 명저 순례를 떠난다. (편집자 주)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와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그녀는 2019년 여름 처음 방한해 미디어와 독자들을 만났다 (사진=창비, 연합뉴스)

[우먼타임스 하기석 편집위원] 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이뤄진 이 책 제목은 최근 수년간 페미니즘과 관련해 지구촌에 가장 많이 회자된 구절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말할 때 이 책과 이 저자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이 유명한 문장은 책 밖으로 나와 지금도 여전히 패션으로, 슬로건으로, 노래로,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페미니즘이 기억하는 역사적 장면이 있다. 2014년 8월에 열린 MTV 비디오뮤직 어워즈. 가수 비욘세가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등장했다. 그가 부른 노래는 2013년 말에 발표한 정규 5집 앨범 ‘비욘세’에 수록된 ‘플로리스(Flawless)’. 갑자기 무대에 ‘Feminist’라는 큰 글자가 하얀 조명으로 반짝거렸다. 노래 도입부에 “페미니스트는 남녀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육성이 나왔다. 이어 비욘세가 노래했다. “우린 결점이 없어, 말해봐 아가씨들. 난 그냥 이렇게 일어났어…(We flawless, ladies tell’em. I woke up like this)”  

2014년 8월에 열린 MTV 비디오뮤직 어워즈에서 팝스타 비욘세가 ‘Feminist’라는 큰 글자와 함께 등장했다 (사진=비욘세 유튜브)

육성의 주인공은 바로 앞에 말한 그 책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다. 세계적 팝스타의 이미지 전략이라는 비판은 받았지만 ‘페미니스트 비욘세’의 커밍아웃 무대이자, 나이지리아 출신의 페미니스트 작가 아디치에를 전 세계 미디어에 소환한 무대였다. 

이 노래 뮤직비디오에는 아디치에의 또 다른 내레이션이 피처링됐다. “우리는 소녀들에게 움츠리고 작아지도록 가르치고 있다. 야망을 가져도 되지만 너무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공을 목표로 해야 하지만 너무 성공하면 안 된다. 남성을 위협하게 될 테니까.”

이 퍼포먼스는 대중문화계 전반에 페미니즘 물결을 일으켰다. 다음 달 유엔 여성친선대사 배우 엠마 왓슨은 유엔이 주관한 여권신장 캠페인 ‘히포쉬(HeForShe)’ 첫 행사에서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뒤따라 영화계 셀렙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다. 

2016년 크리스찬 디오르가 출시한 페미니즘 슬로건 티셔츠와 이 셔츠를 입은 김혜수 (사진=크리스찬 디오르 홈페이지, 유튜브)

패션이 이를 외면할 리가 없다. 패션은 메시지다. 파리 패션위크 2015 봄여름컬렉션은 ‘History is Her Story’ 라는 피켓을 든 샤넬의 모델들이 런웨이를 행진하는 장면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2016년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오르는 아디치에의 책 제목 ‘We should all be feminists’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선보였다. 이 티셔츠는 즉시 세계적 슬로건 패션이 됐다. 페미니즘의 선두에 선 메릴 스트립, 스칼렛 요한슨, 케이트 블란쳇, 제니퍼 로렌스 등이 앞 다퉈 입었다. 국내에선 배우 김혜수가 가장 먼저 인증샷을 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긴 이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그녀의 저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원제, ‘We Should All be Feminists’, 2016년 1월 국내 발간)는 그가 2012년 TED에서 한 강연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이 TED 강연은 유튜브에서 조회수 550만 이상을 기록한 페미니즘의 기념비적 연설이다. 국내에서도 발간 두 달 만에 1만 권 넘게 팔렸다. 100페이지가 조금 안 돼 두어 시간이면 독파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양성평등 국가인 스웨덴은 모든 고등학생에게 이 책을 배부해 읽게 했다. 아디치에는 스웨덴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저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는 ~를 해야 한다, 할 수 없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남녀 모두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 남녀가 진정 평등한 세계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입니다. 16세 때 저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말뜻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페미니스트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스웨덴의 청소년들도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결정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세계가 진짜로 공정하고 평등해져서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없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이 책이 말하는 건 “페미니즘이란 결국은 남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명료한 메시지다. 저자는 페미니즘이란 남성과 여성을 모두 성별 프레임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가 이것밖에 힘을 못 써?”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우는 거야” 이런 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줄곧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전통적인 성역할에 고착된 사고방식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짓누르고 있으며, 페미니즘을 통해 우리 모두가 더욱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일 중 가장 나쁜 짓은,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느껴질수록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취약해진 자아에 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지요.”  

아디치에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인식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딸린 부정적 뉘앙스를 떨어내고 본래의 의미를 되찾자고 역설한다.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싫어하고, 늘 여자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화장을 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늘 화가 나 있고, 유머감각이 없고, 심지어 데오도란트도 안 쓴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에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인권’이라는 막연한 말로 표현하는 건 거짓된 눈가림이란 것이다. 

이 책에는 인상적인 말들이 많이 나온다.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영국 유력지 인디펜던트는 당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며 “이 책을 소년소녀들의 손에 쥐어 주고 싶다. 스스로에게 좀 더 진실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 더 행복해진 여자들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영감을 줄 수 있도록”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유력한 페미니스트 작가 반열에 오른 아디치에(43세, CHIMAMANDA NGOZI ADICHIE)는 1977년 나이지리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비리그 대학들에서 공부했다. 인종, 이민자, 여성에 대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은 소설로 평단의 각광을 받았다. 2011년 ‘뉴요커’가 뽑은 ‘미국을 대표하는 젊은 소설가 20인’에, 2013년 ‘포린 폴리시’가 뽑은 ‘세계를 이끄는 사상가’에, 2015년에는 ‘타임’이 뽑은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됐다. 영연방 작가상, 미국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받았다. 

‘페미니즘의 아이콘’ 같은 수식어가 붙은 아디치에는 2019년 여름 처음으로 방한해 국내 미디어와 독자들과 시간을 가졌다. 나이지리아의 엄격한 상류층 가정 출신 소녀가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담은 장편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한국 출간을 맞아서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한 말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나를 ‘악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이 사라지길 바란다. 페미니즘을 남성혐오 운동처럼 여기는 생각이 페미니즘의 핵심인 ‘대화’를 가로막고 있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 상황, 그게 가장 안타깝다. 페미니즘은 남녀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득권을 뺏기기 싫어하는 남성들의 분노의 뿌리에 대해 얘기해야지, 이 갈등이 페미니즘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해선 안 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받고 소외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한 상황을 바꾸겠다는 의지이자 정의구현 운동이다.”

그는 “페미니즘이 보완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Nothing”이라고 답했다. 페미니즘이 지적하는 문제 대신, 페미니즘 자체를 지적하는 것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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