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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㊱

등반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험의 영역이다

  • 기사입력 2019.12.27 18:14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인도 북부의 평원에서 히말라야를 바라보던 고대 철학자 키플링은, “저 산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신이 거주하는 성역이다”라며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표현했다. 히말라야 산맥은 인도와 티베트의 접경지대에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보다 훨씬 높은 수백 개의 고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고개가 해발 4,500미터에서 6,000미터 대에 형성되어 있어, 다른 지역의 산이 끝나는 고도가 히말라야에서는 등반이 시작되는 지점이 되곤 했다. 수 세기에 걸쳐 인도와 티베트의 광활한 대지는 지도의 공백지대로 남아 있었다. 약간의 유목민과 라마교 승려만이 사원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히말라야의 자이언트 봉들은 적막과 세월에 고립되고 잊혀져 있었다.

19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인들이 히말라야에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탐사와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그들의 조사 범위는 인간이 거주하는 남부지방에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쪽의 고산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서서히 히말라야의 구조와 지형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50년까지 주요 고산은 삼각측량법에 의해 측정되어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1852년 에베레스트가 발견되었고 최고봉으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는 주로 측량가와 지도제작자가 탐사등반을 주도해 나갔다. 7,010미터의 실라 봉이 1851년에 등정되면서 인간도 고산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고, 고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는 인도 측량국의 존슨이 6,700미터 고도에서 며칠간 보내며 고소 극복에 큰 진전이 있었다.

순수한 등반의 목적을 가진 원정대는 1883년 시킴 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등반 성과를 낸 그레엄 팀이다. 그가 시도한 카브루(7,315m)는 캉첸중가의 위성봉인데, 등정 의혹에 말려들어 최초의 기록으로 남지 못하는 불명예로 끝났다. 이 팀은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개척자의 도전정신을 등반에 적용시킨 사례로 인정되었고, 이후 전개되는 히말라야 등반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한 걸로 평가받았다.

당시에는 알프스와 안데스, 북미에서의 등반활동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등산의 시대가 개화되었고, 등산가들의 관심이 중앙아시아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영국의 마틴 콘웨이는 1892년, 왕립지리학회에서 파견한 원정대 대장으로 히말라야 북부의 깊은 고요 속으로 들어간 첫 번째 유럽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더글라스 프레쉬필드는 캉첸중가에 근접했으며, 앨버트 머메리는 낭가파르바트에서 등반하다 희생되었다. 미국의 윌리엄 워크맨 부부는 1899년부터 1912년까지 카라코람 지역에서 여섯 번의 주요 등반을 진행했다. 그들은 각각 56세와 47세의 나이로 피라미드피크(7,130m)를 등정했는데, 부인은 당시 여성 최고봉 등정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1909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활동을 했던 이탈리아의 아브루찌 공이 K2 등반에 나섰다. 등정에는 성공 못했지만 후일 K2 초등정의 중요한 단초들을 제공했다.

콘웨이와 아브루찌의 대규모 원정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규모의 경량 원정대가 주류였다. 롱스태프의 트리술 등정은 두 명의 이탈리아 가이드와 이룬 것이고 이밖에 켈라스, 미드, 노먼 콜리, 브루스 등이 고도와의 끈질긴 도전을 펼치며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등산가들은 정중동靜中動의 잠복기에 들어갔다.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바위와 얼음, 눈, 절벽과 눈사태 등 수많은 장애물들이 등산가들을 괴롭혔다. 수시로 급변하는 날씨와 악천후는 히말라야의 본질이 되었고, 인도와 티베트의 기후는 적도나 극지방의 그것과 달리 바람과 폭풍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몬순 때 인도에서 몰려드는 더운 습기와 찬 대기는 등산가에게 적대적敵對的이었다.

이런 물리적인 자연 장애물 외에 개인적인 편차가 심한 고산병이 있다. 산소가 희박한 고소에서 인간의 내부 장기들이 서서히 그 고도에 적응해야 하며 급격한 신체의 변화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나이와 체력, 병력, 신체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고산등반 능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행동이 둔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며 감정이 불안해지고 무기력해 진다. 심지어 산소통 마저 불필요하게 만들기도 했다.

히말라야에서의 또 다른 문제는 잘 훈련된 가이드와 믿을 만한 포타가 없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산을 종교적인 성스러운 대상으로 간주해 접근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워 했고 신성시 했다. 그러나 최근에 히말라야 등반이 활기를 찾으면서 원주민 등산가인 셰르파가 등장했다. 셰르파의 고향은 티베트 남부지방으로 네팔이나 인도의 다질링으로 이주해 왔다.

엄격하게 말하면 산악 가이드는 아니지만 포타보다는 전문적인 등반기술을 갖춘 등산가다. 구르카 족이 영국군의 외인부대로 진출하고 식크 족이 경찰계로 나가자, 셰르파 족은 등반 가이드를 자신들의 전통적인 직업으로 삼고 자부심을 가졌다.

네팔과 티베트, 부탄의 정치적인 문제로 1921년까지 에베레스트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1920년대에 티베트가 서방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지만 네팔 쪽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네팔이 개방되었지만 이번에는 티베트가 철의 장막 속으로 숨어버렸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지대에서도 출입허가증이 있어야 통과가 가능했다.

이렇게 히말라야는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자연스런 경계선이 아니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장벽으로 갈렸고 세계 열강의 국력을 과시하는 각축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등반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험의 영역이다. 그 모험은 잘 짜여진 조직과 훈련된 대원으로 완성도를 높이지만, 히말라야에서의 등반은 항상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며 진화해 나갔다. 최근의 등반활동은 선배 등산가들의 개척정신과 모험심, 눈사태와 고산병, 몬순과 굶주림의 고통을 이겨내며 만들어진 지도와 루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후의 승자는 정상에 올라 깃발을 세운 이가 아니고, 그들보다 먼저 이곳에서 불굴의 용기와 굳센 의지로 실패를 거듭하며 난관을 헤쳐나간 등산가들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등반대의 규모가 커지고 등반장비도 훨씬 잘 갖추어졌다. 새로운 대상의 탐사나 개척이 아니고 에베레스트, K2, 캉첸중가 같은 8천미터 자이언트 초등정에 집중되었다. 또한 초기의 영국인 중심에서 다양한 국가의 진출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낮은 고도의 산들에 대한 도전도 꾸준히 이어졌다. 파미르 지역의 카우프만(7,101m․레닌피크)은 1928년에 독일팀이 초등정했고, 종송피크(7,418m)는 스위스의 지리학자이며 등산가인 디렌퍼스 교수가 이끄는 국제팀이 초등정에 성공했다.

1931년에는 프랭크 스마이드와 에릭 십튼의 영국팀이 카메트(7,756m)를 초등정했는데, 당시 인류가 오른 최고봉 등정이었다. 이 팀은 4,785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여섯 명의 셰르파와 많은 포타를 고용했다. 루트의 많은 부분이 빙벽이고 눈사태의 위협이 컸지만, 정상 640미터 전 지점에 최종 캠프5를 설치하며 등정을 시도했다. 그들은 급경사진 설사면과 거대한 분설이 날리는 난관을 헤치고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1932년 테리스 무어가 이끄는 등반대가 미냐콩카(7,589m)를 초등정했는데,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성공한 최초의 미국인 등정이다. 1934년에 디렌퍼스는 카라코람으로 들어가서 가셔브룸1봉을 시도했고 퀸메리피크(7,620m)를 초등정했다. 이 등반에서 그의 부인이 서봉(7,315m)에 오르면서 새로운 여성 최고봉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카메트의 남쪽에 난다데비(7,821m)가 있다. 오랫동안 이 산은 인도 북부지역에서 힌두교의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갠지스 강의 발원지로 빈번한 탐사와 조사가 이어졌지만 1934년에 가서야 비로소 인간의 발길이 닿았다. 그 이유는 이 산의 둘레를 7천미터 대의 산들이 이중으로 중세의 성같이 110킬로미터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전혀 노출이 안 되었던 것이다.

유일한 접근로였던 리쉬 강의 협곡은 급류가 심했고 너무 깊어 천혜의 요새 역할을 했다. 이런 자연적 환경에 전설과 종교적 신비가 더해져서 탐험가들의 열정을 더욱 자극했다.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프리카에서 내공을 쌓은 젊은 베테랑 클라이머인 에릭 십튼과 빌 틸만은 1934년에 세 명의 셰르파만을 동반한 채, 난다데비를 서쪽으로 진입해서 리쉬 강의 협곡을 돌파했다. 쉽지 않은 탐사등반으로 포기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틸만이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협곡의 시끄러운 물소리를 뒤로 하고 깊은 고요의 땅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야영 준비를 하며 부산을 떨었지만 자신들이 성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천상의 세계에 온듯이 온통 흥분과 환희의 연속이었다. 등반에 필요한 장비나 식량을 준비하지 않아 루트 정찰과 캠프지 확인만 마치고 돌아섰다. 당시 그들의 결론은 “난다데비 등정 불가능”이었다.

그후 2년 뒤, 틸만은 찰스 휴스톤이 포함된 여덟 명의 영미 합동팀을 이끌고 몬슨 끝 무렵에 초등정을 시도했다. 여덟 명의 대원과 여섯 명의 셰르파가 루트 개척과 캠프 구축에 분주했으며 리쉬 강의 험난한 협곡을 통과하느라 고소순응이 저절로 되었고, 순조롭게 등반이 진행되면서 8월 5일 5,18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교대로 루트 개척과 캠프 설치, 짐 수송을 반복하면서 6,460미터 지점에 캠프3을 설치했지만, 21일부터 강력한 폭풍과 몬순의 검은 구름이 지평선을 덮고 불어닥친 블리자드가 그들을 텐트 속에 포로로 가두고 만다. 며칠 후 날씨가 호전되자 대원들의 스텝 킥킹과 피켈 커팅 작업이 되풀이 되며 6,550미터 지점에 캠프4를, 그리고 캠프5를 7,160미터 지점에 설치하는데 성공한다. 이 고도에 설치된 캠프를 독수리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대원들이 독수리보다 더 모험적인 듯싶다.

노엘 오델과 휴스턴이 1차 등정조로 선발되었지만 휴스턴이 전날 먹은 콘비프 때문에 식중독에 걸려 아래 캠프로 후송되었고 틸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델과 틸만은 아침 6시에 출발하여 조금씩 고도를 높이면서 결국 평평한 난다데비 정상에 사람의 흔적을 남기고 만다. 비록 두 명이 정상에 섰지만 나머지 여섯 명도 함께 올랐다고 만족해 했다. 그들 모두는 등정하기를 갈망하며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기회는 두 명에게만 있다. 자신을 희생하며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 행위가 등산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이고 등산의 본질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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