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㉞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㉞
  • 호경필 전문위원
  • 승인 2019.11.26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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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은 과거의 경험과 실험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실체를 지니고 있는 스포츠다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제임스 램시 울맨ㅣ출판년도 1954년ㅣ쪽수 352쪽ㅣ출판사 리핀코트

마터호른이 초등되면서 알프스 황금시대의 초등 경쟁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등산의 시대가 열렸다. 마터호른 초등 과정에서 발생했던 대참사로 인해 등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식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났다. 이전에는 한정된 지역에서 소수의 클라이머들이 등반활동을 했지만, 1865년 이후에는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으면서 놀랄 정도의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영국의 더알파인클럽은 1857년 창립 당시 회원이 28명이었지만 1875년에는 10배로 늘어났고, 이 새로운 스포츠에 대한 유혹과 열기는 해마다 국적이 다른 클라이머들을 알프스의 빙하와 절벽을 찾게 만들었다. 그 알프스의 중심에 스위스가 있었고, 이로 인해 스위스는 세계적인 호텔 산업의 메카로 발달하게 되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대부분 가이드를 대동하고 정상에 올랐지만 그래도 대단한 모험심과 용기로 평가했다. 등산의 대중화는 직업가이드라는 새로운 붐을 일으켰다. 스위스 산골의 약초꾼과 농부들이 돈벌이가 좋은 가이드로 생업을 바꾸었고 샤모니와 그린델발트는 대규모 관광센타로 개발되었다.

가이드는 다양한 성향과 목적 때문에 그 등반기술 수준이 대체로 낮았지만, 일부 그룹은 상당한 훈련을 받은 베테랑이었다. 쟝 안톤, 루이 카렐, 마티아스 추브리겐 등이 기억할 만한 가이드였으며, 그들은 위험과 고통을 견뎌내고 등산의 세계를 모험의 영역에서 과학과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주인공이었다. 그들의 등반 기량과 자부심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로까지 대를 이어 전해졌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 그리고 점차 생업으로서의 가이드가 목적이 아닌, 클라이밍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가이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등봉이 사라지자 좀 더 뛰어나고 야심찬 차세대 그룹은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도전하는 걸로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해 나갔다. 즉, “마터호른을 올라가 봤느냐”에서 “마터호른을 츠무트로 올랐느냐 아니면 푸르겐 리지로 올랐느냐”로 대화 내용이 바뀌었다. 무슨 봉우리(what)에서 어떻게(how) 등반을 했는가가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이다.

이때 앨버트 머메리가 혜성같이 나타나 알프스를 섭렵하며 소위 ‘머메리즘’을 주장했다. 그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사업가였는데 우연히 등산에 빠지게 되었다. 산을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위험과 어려움을 추구하며 자신의 등반기술을 시험하는 대상으로 규정했고 기록을 위한 손쉬운 성공을 멀리 했다.

당시 불가능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샤르모, 그레퐁, 에귀 드플랑 등의 거벽을 등정했고 줄기찬 노력으로 전설적인 등반 성과와 등반 기술의 새로운 표준들을 생산해냈다. 그는 손과 발을 쓸 수 없는 구간에서는 무릎과 어깨, 팔꿈치와 등으로 자신의 몸을 끌어올렸다. 이것은 침니 등반기술로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등산가로는 기도 레이, 더글라스 프레쉬필드, 윌리엄 콘웨이, 지오프리 영 등이 있다. 이들은 등반기술의 발달 외에도 가이드 없는 기술등반의 발전과 윤리 제정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머메리와 영은 전문가이드나 루트의 정보없이 등반하는 것에 더 만족을 했고, 등반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현대등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구분 짓는데, 등반기술의 보급과 발달이 전세계로 동시에 진행되는 양상이었다. 등반기술은 스포츠의 한 분야로 더욱 민주적으로 전문화되고 정형화 되었다.

대부분 귀족계급이고 유산계층이었던 클라이머들이 점점 다양한 직업군으로 대체되었고, 교육을 받고 도시민이 된 가이드들은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라 고객과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으로 발전했다. 미국에서는 애당초 이러한 사회적 차별이 없었고 아마추어와 프로, 또는 보통의 클라이머와 뛰어난 클라이머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등반의 전문화라는 단어는 사실 시대를 앞서가는 등산가들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산은 산이고 클라이머는 클라이머일 뿐이다. 둘이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자연의 힘과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클라이머의 힘과 기술,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등반의 세계는 크랙맨이나 바위 기술자라고 불렸던 클라이머들이 암벽타기와 빙벽, 설벽, 산악스키, 고산등반 등으로 나뉘어져 각각 발전을 모색했고, 그러면서 광범위한 부분에서 진보가 이루어졌다.

등반장비의 개발도 시대의 흐름에 비례했다. 장비는 불가능하게 여겼던 루트에서의 등반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고 전세계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등반장비는 인공적인 보조 수단으로 등산기술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그 중 피톤과 카라비너의 개발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런 장비들을 이용해 홀드가 없는 거벽과 현기증 나는 절벽, 그리고 오버행을 돌파할 수 있었고 안전을 담보하면서 인간 한계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등산의 어떤 주제도 등반장비만큼 오랜 세월동안 열띤 토론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없었다. 영국에서는 과도한 장비의 사용을 경원시 했고 첨예한 장비가 “클라이머의 능력과 영혼을 유혹하여 등반을 한낱 서커스 단원의 고난도 동작으로 전락시켰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유럽대륙이나 미국에서는 정밀한 장비의 사용을 등반기술로 당연시 여겼고 그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등반은 본질적으로 표준화 되거나 경쟁적 요소가 삽입될 여지가 없었지만, 그런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 알프스에서 보급된 등반 난이도 등급 시스템은 가볍게 걸으며 오를 수 있는 정도를 1급, 죽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의 어렵고 위험한 난이도를 6급으로 분류하였다. 이 등급 체계는 클라이머들에게 루트의 선택과 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반면에 이것이 경쟁의 목표가 되어 영광과 명예에 쉽게 현혹당하는 젊은 클라이머들로 하여금 6급 이하의 루트를 우습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알프스의 3대 북벽과 돌로미테에서의 과도한 경쟁에 불을 붙였고, 클라이머들이 등반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목숨을 건 무모한 경쟁과 무분별한 라이벌 의식은 호전적인 열정을 타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성행했다. 어리석은 그들에게는 승리 아니면 오직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경쟁은 죽음과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새로운 도전과 흥행성 높은 등반이 젊은 클라이머들을 벽으로 몰아부쳤고 그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거기에는 고귀한 인간성이나 등산의 순수한 가치를 구현하는 어떤 활동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 폭풍 질주의 영웅들은 무대에서 사라졌고, 산을 순수하게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산이 다시 돌아왔다.

등산의 속성은 모험이다. 시대와 국적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행위다. 19세기까지 등산가들의 영역은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동쪽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 전체가 그들의 영토로 확장되었다.

등반의 흐름이 신 루트 개척과 등반기술의 향상, 가이드 없는 등반으로 발전되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코카서스로 원정을 계획한 이가 더글라스 프레쉬필드다. 그는 무어와 터커, 그리고 샤모니 가이드들과 함께 1868년 여름, 코카서스 산맥 탐사등반에 나섰고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즈와 카스벡을 초등정했다. 엘브루즈 초등정은 고도라든가 난이도보다는 등반의 영역이 전 세계로 광역화되기 시작했다는 등산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1900년까지 코카서스의 모든 미등봉이 등정되자 아브루찌 공이 아프리카의 산맥으로 탐사등반을 떠났고 인도 히말라야에도 많은 원정대가 진출했으며 안데스와 로키 산맥, 알래스카, 그린랜드, 북극과 남극으로 도전의 지평선이 넓어졌고, 열정이 가득한 등산가들이 오지의 미등봉을 찾아 나섰다. 등산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고 모험심을 자극하며 무한질주 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르코 폴로 이후 잊혀졌던 중앙아시아가 탐험가들의 시야에 잡혔고 오렐 스테인과 스벤 헤딘은 티베트와 몽골, 터키를 횡단하면서 힌두쿠쉬와 파미르를 탐사했다. 에베레스트와 데날리, 아콩카구아, 맬러리와 워쉬번, 힐라리 등 유명한 산과 등산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20세기 등반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무한한 등산의 세계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발췌해서 세상에 알린 것뿐이다.

등산은 지구상의 돌출된 부분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막연한 개념의 운동 행위가 아니다. 등산은 과거의 경험과 실험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실체를 지니고 있는 스포츠다.

등산에 대해 무지한 광산업자가 우연히 데날리 정상을 오른 경우도 있었지만, 등산의 역사는 대부분 의식 있고 자부심이 강한 등산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비슷한 기술과 장비를 사용하고 일정한 규칙과 규범을 지키며 19세기 중반 알프스에서 시작된 등산의 상식과 가치, 그 전통을 획득하고 공유하려는 계승자들이었다.

등산은 개별적이지 않고 사적인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등산은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삶의 한 방편이며, 고산의 오지에서 고난도의 모험을 추구하는 동호인들이 모여서 하는 행위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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