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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㉛

-그들은 오세아니아의 최고봉 카스텐츠를 초등정했다. 이 지역은, 아직도 식인食人의 풍습이 남아있는 곳이다.

  • 기사입력 2019.10.18 10:43
  • 최종수정 2019.10.25 10:52
■하인리히 하러ㅣ출판년도 1964년ㅣ쪽수 256쪽ㅣ출판사 하트 데이비스

1632년, 네덜란드 항해사인 잔 카스텐츠가 적도 오른쪽에 있는 뉴기니의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정글숲에, 눈을 하얗게 이고 눈부시게 돋보이는 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자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결국 그의 이름을 따서 산 이름을 지었지만 이 산은 이국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오지의 특별하고 신비스런 기운이 있었다.

습지와 조밀한 정글숲으로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단절된 이 지역은, 아직도 식인食人의 풍습이 남아있고 카스텐츠는 등정이 안 된 채로 입구까지만 접근이 허용된 까다로운 산이었다. 카스텐츠 위성봉 중의 한 봉우리를 1937년에 네덜란드 원정대가 등정했고, 그로부터 24년 후에 뉴질랜드 원정대가 다른 루트로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다음 해에 필 템플이 다시 도전하기 위해 돌아왔는데, 그는 한 오스트리아 등반가가 고용한 가이드 자격이었다. 그를 고용한 등반가는 유럽에서 유명한 탐험가로 아이거 북벽을 초등정했고 1939년에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도 참가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 북부의 전쟁포로수용소에서 탈옥하여 티베트에서 7년을 살았던 하인리히 하러였다.

하러를 유혹했던 뉴기니의 매력은 석기시대부터 내려온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 살아온 원주민들이었다. 그들과 한 달 동안 이 오지에서 동고동락했었는데 하러는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하러가 원정대 대장을 맡았고 템플이 수색 및 정찰대장 역할을, 러셀 키팍스는 호주 출신의 의사였으며 버트 휴젱가는 네덜란드 공무원으로 포터들을 담당했다. 포터들은 데니족 사람들을 고용했는데, 정글이 처음인 유럽인들의 적응을 위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러는 걷기훈련을 통해 위험한 정글여행에 금세 익숙해졌고 경이로운 강 탐사를 마치자마자 본격적인 카스텐츠 등반을 진행했다.

템플이 줄곧 선두에 서서 베이스캠프 자리를 찾고 있었고 하러와 대원들, 포터들이 뒤를 이어 따라갔다. 포터들은 데니족의 고유 전통인 성기 가리개와 머리망을 벗어던진 알몸 그대로였다. 베이스캠프가 만들어졌고 15명의 포터가 남아서 식량과 장비 등을 고소캠프로 이동시키는 작업과 안전한 하산을 위해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데니족에게 이 지역의 산들은 대단히 소중하고 신비스런 존재로 신성시했다. 그들은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기에 정상 부근에 쌓인 눈을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필수품인 소금인 줄로 알았는데, 겁을 잔뜩 먹고 이 하얀 물질을 깡통에 담아 마을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기도 했다.

3천미터 이상 되는 지역이라 매우 추웠고, 하러는 포터들의 보온을 위해 별도의 옷을 준비해왔다. 원주민들은 단 한 번도 바지라는 것을 입어본 적이 없었고 신발이나 귀마개를 써본 일도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꾀를 내서 입어보고 신어봤는데, 바지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는가 하면 팔소매로 발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래서 대원들이 나서서 포터들에게 일일이 옷을 입혀주었고 성기 가리개도 뽑아냈다. 정상적인 바지에는 이 가리개를 찬 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중에는 가슴 위까지 차는 긴 가리개도 있었다. 원정대는 열대의 이끼류가 발 밑에 카페트처럼 깔려있고 밝은 색의 꽃들이 지천으로 만발한 정글숲을 지나 계속 고도를 높여갔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숲길이 끝나고 나무지대가 열렸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고개를 넘어서니, 그들 앞에 카스텐츠의 널따란 북벽이 시야에 가득 찼다. 하러와 대원들은 이 장면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로 인정받았다. 예전에도 몇몇 사람이 왔었다고 했지만 기록이 남아있질 않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937년에 네덜란드 등반가가 한 번 이곳에 왔었고, 영국 탐험가인 알렉산더 올라스톤이 1913년에 카스텐츠의 남쪽에서 등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올라스톤이 당시에 이 장면들을 찍어서 가져왔더라면 이 산이 이때까지 처녀봉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진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등반가들을 단번에 유혹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2월 12일, 하러는 텐트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이 깨며 등반이 계속 연기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날이 개었고 마치 아이거 북벽에서 폭풍이 지나간 후의 날씨 같았다. 카스텐츠 북벽은 온통 질퍽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들은 등반 루트를 바위가 많은 북벽의 오른쪽 사면으로 잡았다. 석회암 바위가 거칠었고 작게 주름진 바위 돌기들이 많았는데, 고무창을 댄 등산화를 신은 그들에게 유리했다.

수직의 직벽도 올라갈 수 있었다. 날씨가 계속 좋아졌고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밤 9시에 톱니같이 깔죽깔죽하게 생긴 서쪽 능선에 올라붙었다. 그곳에는 검고 날카로운, 거의 바늘같이 가느다란 수많은 석회암 침봉들이 서 있었다. 마치 유령의 도시를 입체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분위기다. 이 침봉들은 너무 날카롭고 날이 서 있어 철강제련소에서 사용하는 가죽장갑을 끼고 만져야 했다.

면도날 같은 바위 지대는 곧 눈 속에 파묻혔고 구름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네 사람은 그새 자신들이 짙은 안개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프를 묶고 등반을 서둘렀다.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해 어느 오버행 밑에서 잠시 대피했다. 그들은 입은 옷이 온통 물에 젖는 바람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오돌돌 떨어야만 했다.

알프스에서 동계 등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위험한 걸리를 지나치면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확보해주었고 힘들게 바위기둥들을 통과했다. 그리고 설벽에서 균형을 어렵게 잡으며 올라갔는데 갑자기 길이 끊겼다.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오세아니아의 최고봉 카스텐츠를 초등정했다. 하러는 이 산을 히말라야와 안데스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난이도로 평가했다. 그날 밤 늦게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14시간 만에 다시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돌아왔다. 거기서 네덜란드 술과 오이로 등정 축하 파티를 열어 자축했다. 안주로 먹은 오이는 하러가 지난 3주간 비상용으로 자신의 배낭에 고이 간직하고 다녔던 비상식량이었다.

글ㅣ호경필(전 한국산서회 부회장, 대한민국산악상 산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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