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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㉘

-당시의 형편없는 장비와 조건 속에서도 세계 최고봉에 도전했던 그들의 도전 정신과 순수한 영혼이 바로 그것이다.

  • 기사입력 2019.09.10 11:04
■조센 헴렙ㆍ에릭 시몬슨 공저ㅣ출판년도 2002년ㅣ쪽수 207쪽ㅣ출판사 마운티니어스 북스

1924년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의 시신이 1999년 발견되면서 남겨진 의문은, 등반 파트너였던 샌디 어빈의 존재였다. 그리고 카메라와 같은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 못해 그들의 등정 여부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2001년 3월 20일, 에릭 시몬슨을 대장으로 한 아홉 명의 ‘말로리ㆍ어빈 탐사대’ 대원은 에베레스트 롱북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이들은 1920년대의 영국팀 고소캠프와 1960년과 1975년의 중국팀 고소캠프를 집중 추적하면서 새로운 장비들을 다량 발견했다.

그러나 말로리와 어빈의 등정을 증명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들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단서는 중국 북경에서 얻을 수 있었다. 1960년과 1975년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주징과 왕홍바오의 미망인을 취재한 결과, 그들이 말로리와 어빈의 시신을 본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말로리와 어빈의 미스터리를 풀 어빈의 시신 위치를 확인하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어빈의 시신을 발견하면 카메라의 존재 여부와 나머지 의혹들도 상당부분 밝혀질 것으로 기대했다.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을 맞이했지만, 혹시 이보다 29년 전에 초등된 것은 아닌지? 이 문제는 1924년 당시 등반대가 영국으로 귀환하자 열띤 찬반 논쟁이 있었다. 처음에는 대체적으로 등정 후 실종된 것으로 흐름이 잡혔었다. 말로리와 어빈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같은 팀의 지리학자인 노엘 오델이 등정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했고, 말로리의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기량, 그리고 그의 결단력이 보태졌던 것이다.

그러나 1년 사이에 그들의 등정을 부정하는 쪽으로 여론이 반전되었다. 오델이 마지막으로 말로리를 목격했다는 시각이 오후 12시 50분 경이었는데, 사실 이때는 등정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어빈의 무경험과 루트의 곤란함, 남은 등반 거리 등이 그들의 등정을 방해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1980년 단독 무산소로 이들의 루트와 동일하게 등반했던 라인홀트 메스너는, “1920년대의 등반 장비와 기술로는 절대로 등정할 수 없었을 거라는 판단이 증거”라고 주장했다.

말로리와 어빈의 등정을 확인시킬 수 있는 증거를 찾는 작업은 등반의 역사를 다시 쓰는 엄청난 일이다. 그들의 흔적은 1933과 1960년, 1975년, 1991년에 부분적으로 발견되었고, 탐사만을 목적으로 한 등반대는 1986년 미ㆍ영 합동대와 1999년의 미국뿐이었다. 1998년 8월, 독일에서 지리학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헴렙과 미국의 한 출판사 직원이었던 래리 존슨이 인터넷에서 만나 말로리ㆍ어빈 탐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이 원정대가 태동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30년간 80여 회의 상업등반을 진행했던 시몬슨에게 알려지면서 구체화되었다.

1999년의 봄 시즌은 탐사대가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전년 겨울에 강설량이 적어 에베레스트 상부에 적설이 없었던 것이다. 말로리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던 콘라드 앵커는, 말로리의 시신이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오히려 경건하기조차 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그 어느 이름도 말로리만치 에베레스트를 연상케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말로리가 “에베레스트에 왜 가고 싶어하느냐?”는 질문에 답한 “에베레스트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간다”는 명구는, 산악인들 사이에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모순이 가득찬 대답이 되었다. 말로리는 당시 교사 생활을 하는 엘리트였지만 일상에 별로 흥미가 없었고, 반면 등반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부인과 세 아이를 남기고 선택한 등반은, 그에게 내면의 갈등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통을 주었고 결국 그 산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낭만적이었고 미남에 훤칠한 체격과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지금 만나게 된 현실의 말로리는 아서왕의 그 기사다운 풍채는 사라졌고 더 이상 전설 속의 영웅은 아니었다. 지금은 결정적인 증거의 부재로 논쟁이 활발하지 않다. 그러나 근대 등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고 전설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많은 변화와 함께 새로운 도전과 모험이 시작되었다.

탐사원정대 대장인 시몬슨은, 당시 일반인들의 관심과 파장이 그렇게 대단한 줄 예상 못했다고 했다. 말로리의 시신 발견 이후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의 참여와 논쟁이 더 뜨거웠다. 탐사원정대가 귀국하자 연일 인터뷰가 쇄도했고, 그들의 강연은 미국과 영국에서 대성황을 이어갔다. 에베레스트에서 채집된 말로리의 유품은 워싱턴DC의 ‘내셔널지오그래픽 탐험가 전시관’과 ‘워싱턴주립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지금도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말로리 탐사와 관련한 서적이 여섯 종 발간되었는데, 각기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고 등정 여부도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결론지었다. 말로리의 딸 클레어(2001년 사망)는 탐사원정대의 보고서 서문에 감사의 인사말을 써 주었다. 아들 존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가족의 상실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되살려 주었다고 감사해 했다. 그렇게 높은 고산에 묻힌 아버지의 산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종된 지 80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에 대한 탐사와 미스터리가 아직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등정 여부를 떠나 다른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형편없는 장비와 조건 속에서도 세계 최고봉에 도전했던 그들의 도전 정신과 순수한 영혼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무한한 편의를 제공했지만, 아쉽게도 인간의 가치와 신뢰를 높여주는 자연에 대한 도전 의지를 빼앗아 갔다.

말로리와 어빈의 이야기가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척이나 고민스럽다. 그들은 안전을 담보하고 편리함을 주는 등반 장비보다 결단력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본연의 능력에 더 큰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뢰가 그들이 선택한 최고의 등반 장비가 되었었다.

에베레스트에서는 지금도 산소가 희박하고 바람이 사납고 추위는 지독하다. 그리고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길을 찾고 있는 등반가들이 있다. 탐사원정대는 일련의 강연과 슬라이드쇼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말로리와 어빈의 모험과 도전의 의미를 전달했다고 자평했다. 시몬슨은 수많은 등반을 경험했고 그 등반들은 모두 시작과 끝이 있었지만, 이 탐사등반만큼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갈수록 숙제만 더 쌓여가고 있다며 고민하고 있다.

글ㅣ호경필(에코로바 커뮤니티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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