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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입법 특집] ② 미성년자 취약점 파고드는 '그루밍' 성범죄, 심각한 사회문제로

-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폭력을 용이하게 하거나 은폐하는 행위
- 피해자가 성폭력·성추행을 당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많아 처벌 어려워
-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만 16세 이하로 상향하자 목소리도...현재는 만 13세

  • 기사입력 2018.11.17 12:45
  • 최종수정 2020.02.19 16:24

[우먼타임스 이은지 기자] 인천의 한 교회 목사가 10~20대 여성 신도를 대상으로 '그루밍(grooming)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증언이 나와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부천의 한 학원 강사 역시 제자에게 비슷한 방법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고소장이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비슷한 사건의 성범죄가 연이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루밍' 성범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루밍 성범죄란 가해자가 취약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와 신뢰관계를 쌓은 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이용해 성적 학대나 착취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주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매우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그루밍 범죄에 대한 명확한 처벌 규정을 만들어 달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루밍 성범죄 뜻. (사진=연합뉴스)

◆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가 미성년인 경우 많아 더욱 심각

본래 그루밍(길들이기·Grooming)은 동물이 자신의 털을 혀나 손으로 가다듬을 때 많이 쓰이는 용어이다. 패션과 미용에 관심 있는 남성을 '그루밍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파생된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폭력을 용이하게 하거나 은폐하는 행위'를 뜻한다. 주로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에 나타나는 수법이다. 가해자는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거나 진로고민 상담을 하며 상대에게 다가간다. 이렇게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신뢰를 얻으면서 상대가 스스로 성관계를 허락하도록 만든다. 성폭행 피해가 발생한 뒤 상대를 회유·협박하며 피해 폭로를 막는 행위도 포함된다.

대표적 그루밍 성범죄는 2013년 아들의 병문안을 갔다가 만난 15살 여중생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하게 한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상습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가해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목사도 피해자들에게 스승과 제자 사이니까 괜찮다며 입맞춤부터 하자는 식으로 회유를 한 것으로 밝혀져, 그루밍 성범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성범죄'인 것을 '그루밍'이라는 용어에 빗대어 범죄를 유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 피해자가 피해 사실 인지 못해...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 묻게 돼

그루밍 성범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보통 피해자가 성폭력·성추행을 당했다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표면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여서 처벌이나 수사가 어렵다는 것이다.

6일 교회 그루밍 성폭력 기자회견에서 증언한 피해자는 "거부할 때마다 나를 사랑하고 그런 감정도 처음이라고 했다"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할까라는 생각에 김 목사를 믿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나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성적 장애가 있는데 나를 만나서 치유됐다는 식으로 말했다"며 "오랫동안 존경한 목사님이어서 처음부터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위 사례들처럼 그루밍을 범죄로 포섭할 수 있는 법규도 미비해, 오히려 피해자에게 성폭력의 책임을 묻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피해자에게 '서로 사랑했던 것 아니냐', '폭행이 지속됐는데도 왜 신고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 상담소(탁틴내일)는 2014년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성폭력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전체 78건 가운데 그루밍에 의한 성폭력 사례가 34건(43.9%)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그루밍 양상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학원·학교 교사가 친밀하게 대하면서 용돈을 주고 진로 상담을 하면서 신뢰를 쌓거나, 친아버지나 의붓 아버지가 '다른 아빠들도 이렇게 한다'며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경우 등이다.

◆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만 16세로 상향하자" 청원도

아동·청소년 전문가들은 그루밍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기준 마련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형법상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은 만 13세 이하로 규정돼 있다. 만 13세 이상의 청소년이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하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 

2018년 5월 '형법상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은 만 16세 이하로 상향돼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오면서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문제가 다시 논의되고 있다. 이처럼 미성년자 의제 강간 연령을 지금의 만 13세에서 미국이나 영국, 호주 등처럼 만 16세로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전 세계적으로 150여 개가 넘는 나라들이 '의제강간', '동의 연령(age of consent)', 또는 '성적인 성숙(sexual maturity)' 등의 용어를 사용해 미성년자의 성 보호를 위한 최저 연령을 설정하여 이 연령 미만의 자에 대한 성관계는 무조건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멕시코나 칠레가 가장 어린 나이인 12세 미만을 의제강간 연령으로 정하고 있고, 한국과 일본이 13세, 중국이나 헝가리 등이 14세, 프랑스와 덴마크 등은 15세 미만이다. 하지만 영국, 벨기에, 네팔, 스리랑카, 홍콩, 호주, 이스라엘, 케냐 등 가장 많은 나라가 택하고 있는 의제강간 나이는 16세이다. 미국의 경우는 주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16세 또는 17세 미만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난 1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미투운동, 법을 바꾸다' 토론회 현장 모습. (사진=이은지 기자)

지난 1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미투운동, 법을 바꾸다> 토론회에서 정미례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공동대표는 "의제강간 연령 논쟁보다는 그루밍 방식으로 인해 피해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즉,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문제에 대해 국가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재련 온·세상 대표변호사는 13일 열린 '2018 사이버안전 학술세미나'에서 '사이버성폭력의 문제점 진단 및 개선방안'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이같은 의견을 냈다. 그는 "아동·청소년을 상대로 성적 의미가 내포된 사진을 요구하거나 성적 대화를 시도하는 행위를 범죄화해야 한다"며 "성적 접촉 이전 단계의 행위도 처벌하는 영국처럼 성 접촉 전 '온라인 그루밍'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그루밍 성범죄는 평소 믿고 따르던 사람이 성적 학대를 가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가해자가 처음부터 악인의 얼굴을 하고 접근하지 않기에 충격이 배가 되고, 사람의 신뢰를 이용한 성범죄이기에 죄질이 더 나쁘다. 어떤 이유에서든 타인의 유약함을 미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정부와 성범죄 전문가, 여론까지 전방위에서 신경을 쓰고 있는 만큼 가해자는 '그루밍'이라는 단어 뒤에 숨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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