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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산책]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④

-여성 최초 앨리슨 하그리브스는 산소,셀파 없이 단독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 K2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 갑작스런 폭풍에 희생

  • 기사입력 2018.09.03 15:27
■ 데비드 로스, 에드 더글라스 공저ㅣ출판년도 2000년ㅣ쪽수 277쪽ㅣ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 펴냄

[ 호경필 전문위원] “1995년 5월 1일, 스코틀랜드의 앨리슨 하그리브스는 여성 최초로 산소와 셀파의 지원없이 단독으로, 에베레스트 북릉을 통해 등정에 성공했다. 3개월 후 그녀는 역시 같은 방식으로 K2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 갑작스런 폭풍에 희생되었다.

그녀가 깎아지른 절벽의 공포와 죽음의 지대에서 얻은 자유와 성취, 그리고 그 꿈을 좇는 열정 가득한 여성, 결혼생활의 불화와 갈등으로 파탄을 맞은 아내, 이혼 후 아이들과의 생활을 위해 생계수단을 확보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해야 하는 엄마의 직업은 전문등반가였다. 앨리슨이 계획한 경이로운 등반들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고 수단이었다.

이렇게 고단했던 그녀 삶의 중심에는 아들 톰과 딸 케이트가 있었다.(톰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엄마의 산’이었던 K2 등반에 나섰지만 등정을 하지는 못했다) K2를 등반하며 앨리슨은 한시도 그들을 잊은 적이 없었고, 이번이 마지막 원정이라며 지금쯤 숨을 고르며 자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렸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시간만큼 집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설레임에 마냥 즐거웠다. K2 정상을 밟고 하산하는 순간부터 폭풍이 그녀를 휘감은 바로 그 순간까지, 앨리슨은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냈다.”

앨리슨은 9살 때 영국 최고봉인 벤네비스를 올랐고 13살이 되던 해에는 로프를 묶고 피크 디스트릭트에서 암벽등반을 경험했다. 발레처럼 유쾌한 동작으로 등반을 진행하고 빠른 전진을 위한 능력은, 힘이 아니라 침착성과 끈기라는 것도 배운다. 1975년 10월, 더그 스코트와 듀갈 헤스톤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은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 나이 또래의 소녀들은 팝스타에 열광했지만 앨리슨 방에는 온통 산과 산악인 포스터들로 장식되었다. 1977년 노르웨이 원정등반대에 선발되어 산이라는 대자연과의 교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원정등반을 다녀온 후 시내에 있는 아웃도어 장비점에서 주말 알바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주인이 훗날 남편이 되는 제임스 발라드(이후 짐)다.

4월부터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한 ‘토요일의 소녀’ 앨리슨에 대해 짐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짐은 돈이 많았고 첫 번째 부인인 진과 알프스로 스키와 등반여행을 가곤했다. 앨리슨은 16세의 나이로 그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짐과 업무외적인 우정이 생겼고, 함께 클라이밍도 하고 저녁도 같이 하는 사이로 발전했으며 18세 성년이 되던 1980년 2월, 앨리슨은 가방을 들고 짐과 같이 살겠다며 부모 곁을 떠났다. 그녀의 친구에 따르면 앨리슨은 36세의 애연가인 짐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짐의 재산에 더 이끌렸을 거고, 무엇보다 등반에 전념할 수 있다는 조건이 그녀를 만족시켰을 거란다.

세월이 흐르면서 앨리슨은 히말라야 등반에 야망을 갖고 있었지만 짐은 반대했다.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사업에만 제한된 생활을 하길 바랬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나이와 성격 차이는 부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짐이 앨리슨에게 손찌검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짐은 앨리슨이 등반훈련에 지쳐 휴식을 달라고 할 때 가장 기뻐했다.

그녀를 클라이밍 기계로 만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클라이머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앨리슨은 아이를 갖게 되면 짐과의 관계가 변하고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설계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1988년 2월, 짐은 9년간 별거했던 본처와 이혼하고 앨리슨은 임신을 하고, 그해 4월에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아이를 낳으면 산에 다닐 시간이 없을 거라며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아이거 북벽을 등반한다. 영국여성 최초의 등정으로 언론들은 대대적인 보도를 했지만, 일부에서는 자신의 야망과 명성을 위해 임신 중에도 등반을 했다며 순수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1980년대 말부터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등산장비와 아웃도어 상품들의 수요가 줄었고, 짐이 새로 시작한 장비제조업이 어려워지면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재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녀를 구타하는 빈도가 잦아졌는데, 아들 톰이 없었다면 그녀는 벌써 이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톰이 더 성장하기 전에 같이 놀아 줄 동생의 절실함에 고민하다가 1991년 3월에 딸 케이트가 태어나게 된다.

1992년 2월, 앨리슨은 마터호른 북벽 동계 단독등반에 성공했다. 이 계획은 짐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문등반가가 되어서 협찬사를 모으고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하면 충분한 수입이 보장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명성과 평가를 받아야 했다. 1993년 봄, 앨리슨은 알프스 6대 북벽을 단독으로 오르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당시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카트린느 데스티벨을 뛰어넘는 여성 최초의 기록이 된다. 샤모니에 도착한 가족은 텐트생활을 하며 등반준비를 했다. 낮에는 어린 두 아이를 나이 든 아빠가 돌보고, 저녁에는 산에서 내려온 엄마가 밥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잠을 재우는 생활이었다. 6대 북벽을 무사히 끝내고나서 동계 그랑드조라스 북벽 단독등반에 도전했다.

헬기에서 촬영한 이때의 등반사진으로 그녀는 전 유럽과 북미의 언론매체에서 각광을 받았고, 영국 산악계에서도 앨리슨의 이미지가 오히려 새롭게 부각되는 반전이 되었다. 이 등반의 성공은 그녀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전문등반가로서의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가족의 부양을 위해 좀 더 획기적인 성과가 필요했던 앨리슨은 1995년에 에베레스트와 K2, 캉첸중가로 이어지는 세계 3대 거봉 연속 단독등반의 계획을 세운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경제적인 안정이 확보되고 남편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아이들과 정착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1995년 3월, 티베트로 들어가 북릉을 통한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다. 모든 장비를 혼자서 옮기고 캠프 설치와 이동을 진행했다. 산소도 없이 ‘죽음의 지대’에 들어섰지만 제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 발과 머리, 거친 숨을 내쉬며 5월 1일 정상에 오른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협찬사를 만나고 언론과의 인터뷰, K2 등반준비 등으로 며칠간의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현실을 무시한 자기중심적이고 엄마로서의 역할에 실패했다’는 일부의 비판에 대해 괴로워했지만, 등반이 끝나면 그들이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1995년 6월, 두 번째 프로젝트 대상지인 K2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고 하나 둘 철수하는 팀이 늘어났다. 그녀는 두 아이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고민을 거듭했고 조바심이 났으며 판단력이 흐려졌다. 또한 많은 언론매체가 그녀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드디어 캠프를 철수하기 위해 포터들이 도착했다. 귀국 비행기 시간을 맞추려면 이때 철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과 K2 모두를 원했다. 아이들 옆에 당장 엄마가 있다면 아이들에게는 잠시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K2를 등정한다면 아이들에게는 더 훌륭한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이번에 K2를 오르면 다시는 아이들과 오래 떨어져 있지 않을 거라는 다짐도 한다. 그녀는 실패하든 성공하든 한 번 더 등정을 시도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8월 13일, 8200미터 지점의 바틀넥을 향했지만 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저산소증으로 대원들의 행동과 생각, 판단이 느려졌다. 그들은 저 구름이 얼마나 격렬한 폭풍을 몰고 올지, 또 언제 그 비극이 시작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지루한 전진만 반복할 뿐이었다. 오후 6시 30분, 앨리슨을 포함한 6명이 시속 160킬로미터 이상의 허리케인 같은 폭풍을 뚫고 K2 정상에 올랐고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8월 14일 오후 4시에 하산하던 스페인 팀은, 7300미터 지점에서 건전지로 작동되는 가열기가 붙은 빈 등산화를 발견했다. 이 장비를 사용한 사람은 앨리슨뿐이었다.

글ㅣ호경필(에코로바 커뮤니티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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