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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봉 칼럼] 딸바보와 바보아빠

  • 기사입력 2018.06.13 06:16
  • 최종수정 2020.08.24 15:49

나도 ‘딸바보’다. 딸과 함께 산다. 직업을 가진 장성한 딸이다. 집안에 딸이 있을 때 분명히 더 행복하다. 자꾸 딸 방을 기웃거리게 되고, 뭐든 챙겨주고 싶고, 무얼 하든 더 많은 스킨십을 기대한다.

그런데 성인이 된 딸이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우물가에 내놓은 아이로 보이니 이건 누구의 문제일까. 자정이 가까워도 대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아내와 함께 안절부절하기 시작하고 행방을 좇는다. 아들은 밤 12시가 훨씬 넘어 문자 한 통이 없어도 별 걱정 안 한다. 차별이라 해도 할 수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현관문이 열리며 “아빠, 나 왔어”하는 딸의 목소리다. 딸 가진 아빠는 나처럼 보초를 서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공원의 한적한 공중화장실 주변에서, 음식점 건물의 후미진 계단 공용화장실 앞에서 계면쩍은 모습으로 어슬렁거려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빠가 아니다. 

추성훈과 사랑이, 추블리 부녀. 많은 아빠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아빠들은 딸바보로 그려졌다. (사진=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화면 캡처)

이 시대 아빠들은 딸바보임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지갑 속에 애지중지 딸 사진을 넣고 다니거나 휴대폰 바탕화면에 딸 사진을 깔고 다니는 아빠들이 많다. 세상살이가 팍팍한 아버지들에게 딸의 미소와 애교는 큰 위안이자 존재의 이유다. “남편이 딸을 바라볼 때는 나와 연애하던 때보다 더 애틋해요. 남편이 아들하고는 서먹한데 딸하고는 너무 잘 통해요”라는 엄마들의 불만은 일리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딸바보 아빠가 차고 넘친다. 딸바보 전염병은 사실 ‘아빠 예능’에 기댄 바 크다. 2010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큰 변화 중 하나는 아버지의 자리가 확대된 것이다. ‘아빠 어디가’(MBC)를 시작으로 ‘슈퍼맨이 돌아왔다’(KBS), ‘아빠를 부탁해’(SBS)처럼 아빠와 자식의 관계를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었다. 근육질의 격투기 선수 추성훈이 어린 사랑이 앞에서는 대책 없이 무장 해제되는 모습, 그게 바로 딸바보다. 

이상적인 아버지상은 변하고 있다. 마초적이고 근엄하고 ‘꼰대’ 같은 아버지는 점차 우리 사회나 가정에서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한국 대중문화가 보여주는 딸바보 아빠의 모습은 대체로 딸에게 다정다감하고, 예뻐하기만 하고, 보호하고, 소유하는 이미지가 짙다. 과거의 가장에게는 찾기 어려웠던 가정적 모습을 부각하지만 동시에 딸을 미성숙한 주체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따른다. 
 
‘딸효과(daughter 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딸 양육이 아빠의 행동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연구한 결과 나온 말이다. 딸을 둔 남성 국회의원이나 판사들의 입법 활동이나 양성평등적 판결이 유의미하게 높았다고 한다. 딸을 둔 남성 CEO가 경영하는 기업도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조직문화의 평등성과 다양성, 여성채용 비율 등이 높게 나왔다. 딸을 키워본 아버지들이 그만큼 여성이 처한 불공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성평등 문제와 인권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유리천장을 깨고 성공한 여성들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좋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아버지와 친밀하고 지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어머니한테 주로 얻는 정서적 지지와는 달리, 아버지에게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공감과 격려를 받아 성취감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각설하고, 정작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이것이다. 이렇게 너도나도 딸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보호하려 하는 딸바보가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왜 남녀차별과 불평등과 여성혐오와 성폭행은 줄지 않고 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빠를 부탁해’에서 딸에게 다정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두 유명 배우가 성추문에 휘말려 비극으로 치달은 걸 목격했다. 이미지의 대반전은 충격이고 배신감이었다. 그들은 결국 늑대이자 마초였지만 TV에서는 딸바보라는 선한 이미지로 포장됐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여성을 상대로 한 천하의 흉악범도 가정에서는 지극히 자상한 아빠였다는 걸 우리는 많이 봐왔다. 성폭행의 가해자도 나와 같은 딸바보였다. 자기는 늑대이면서도 내 딸만은 늑대에게 줄 수 없다는 사람들이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며 강남역 출구 앞에서, “우리의 일상은 포르노가 아니다”며 홍대 앞과 대학로에서 수만 명의 우리 딸들은 모여서 외쳐댔다. 백주대낮 대로에서 “여자도 더우면 웃통 좀 깔 수 있다”며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며 시위하고, 낙태죄 폐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몰려갔다. 2018년 한국 사회를 읽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페미니즘이다. 성 자체를 정치적으로 쟁점화 하는 ‘젠더 정치’ 시대가 열렸다.

누구의 잘못일까.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인가. 내 딸은 그냥 딸아이일 뿐이고, 남의 딸은 여자란 말인가. 가족만 중요했고 공동체의 모럴은 없었던 것이다. 딸바보임을 자처하는 이 시대 아빠들은 이 모순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최근에 한 여성학자의 글을 읽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 반성했다. 왜 그 생각에 미치지 못했을까. 진정한 딸바보의 자격이 되려면 내 딸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왜 이렇게 험난하고 무서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늑대들로부터 딸을 지키거나 지켜줄 남자를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딸을 해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고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딸아이에게 늘 조심하라고 말할 게 아니라, 아들에게 여성에 대한 공격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딸을 가진 아버지들부터 성차별에 더욱 예민해야 하고, 젠더 감수성을 갈고 닦고 공부해야 한다. 남성에게 권력과 기회가 편중된 사회 토양을 바꾸는 데 노력해야 한다. 지혜로운 딸바보 아빠라면 사랑만 표현할 게 아니다. 내 딸이 이 세상에서 남자들과 동등하게 굳건하게 주도적으로 홀로 설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딸이 하고 있는 일에 스스로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네가 참 자랑스럽다”고 격려해야 한다. 딸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건 오히려 딸의 주체성을 떨어뜨리고 의존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만든다. 딸바보가 바보딸을 만들 수 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딸을 가진 아빠들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두 딸 말리아, 샤샤를 엄격하게 키웠다. (사진=미셸 오바마 트위터·백악관)

두 딸을 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을 얼마 앞두고 여성잡지 글래머에 이런 기고를 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두 딸의 아버지가 되면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성차별이나 성적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싸움에 동참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배우자로서 남자친구로서 남성의 책무다. 성평등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얌전하게 남자는 강하게 키우려는 태도, 딸의 자기주장이나 아들의 눈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바꿔야 한다. 딸을 키우는 아빠가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딸들이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가장 빼어난 페미니스트 작가로 평가받는 록산 게이(44세, 여성, 미국 퍼듀대 교수,  아이티계 이민 가정 출신의 흑인)는 유명한 저서 ‘나쁜 페미니스트’(2016년, 국내 출간)에서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은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의 성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고 말했다. 

그녀는 테드 강연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습니다. 페미니스트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압박감을 주고, 불편하고, 두렵고, 반항적인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해도 나는 ‘나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서라도 페미니스트로 살겠습니다.”
사족. 나는 결혼식장에서 사위에게 딸을 넘겨주며 “잘 부탁하네”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기획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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